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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족족 독후감이랍시고 글을 써대던 때가 있었다. 상금이나 상품으로 보상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숙제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재미있으니까. 쾌락주의자로서 당연했다. 어쩌다 재미가 없어져 쓰지 않고 읽기만 했다. 안 써도 되던데. 좋이 되는데, 쓸 때보다 더 재미가 없는 게 함정이다. 쓰러 왔다. <쓰기의 말들>이다.
쓸 수도 없고 안 쓸 수도 없는 딜레마에 놓인 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 (87/335)
글쟁이가 아니어서 고통이라고까지는 못 하겠고 고통을 ‘노잼’과 바꿔 읽으니 내게는 맞갖다. 쓰지 않고 읽기만 하는 동안 배운 게 있다. 읽은 게 금세 휘발한다. 빌린 책을 잘 못 읽는 주제에, 사 읽은 책임에도 내 책 같지가 않아진다. 감흥이 없었다면 ‘감흥이 없다, 왜냐하면 어쩌구저쩌구’ 써야 비로소 내 책이 됨을... 너무 당연해서 부연하고 싶지도 않다. 대신 은유 작가가 인용해준 이오덕 선생의 문장을 옮겨놓으련다.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153/335)
사실은 이런 글을 쓸까봐 겁이 났던 것도 같다. 알라딘 서재에 ‘좋아요’질을 하면서 좋은 글 나쁜 글 이상한 글 많이 봤다. 좋은 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상하고 재미난 글에도 감탄했다. 글 구경은 재미있고 남 글의 단점도 간혹은 보이는데 내 글 단점은 나도 몰라서 또 ‘나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쓰기의 말들은 읽기의 말들이기도 하여서 실용서이기도 하고, 향유하여 좋은 예술서이기도 하다. 자소서 첫줄에 ‘글 쓰는 사람’이라고 밝히는 이의 내공을 보라. 은유 작가 글 정말 잘 쓰신다. 커피로 치자면 ‘바디감’도 있고. 입안에 가만 머금어 보다가, 글 잘 쓰는 사람이 또 있었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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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글쓴이 이름 밑에 ‘리뷰소설’이라고 쓰여 있다. 리뷰가 주를 이룬 가운데, 형식으로 소설을 빌려온 모양새 되겠다. 전작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에 짧은 소설이 등장하였던 것과 비슷하다. 저번 작품이 교정 원고를 매개로 한 사건이었다면 이번엔 저자가 우연히 엿들은 옆 테이블 커플의 대화가 주조다. 장기 적출+뜻밖의 셰익스피어. 그런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왜 읽어도 읽어도 자꾸 잊어버리는지? 김정선 작가도 그래서 기록을 남긴 게 아닐까.
가령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주어’의 성벽에 갇혀 신음하는 ‘나’를 보여주기도 하고, 『헨리 4세』를 통해서는 ‘주어’를 속임으로써 ‘주어’ 안에 분명한 자리를 만드는 ‘나’를 그려내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리어 왕』이 ‘나’를 질투한 ‘주어’의 비극이라면, 『오셀로』는 ‘주어’를 질투한 ‘나’의 비극이고, 『맥베스』는 ‘주어’를 죽인 ‘나’의 분열이 아닌가. (57)
음. 그랬나. 다른 걸 발췌할 걸 그랬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건 있다. ‘행복’은 ‘사랑’과 달라서 내가 온전히 주도할 수 없다는 것. ‘사랑하다’는 동사여서 주어인 내가 그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을 온전히 주재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는 형용사여서 주어인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나는 다만 그 ‘행복한’ 형용, 즉 행복한 그림 안에 들어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그렇지 않을 땐 행복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사랑과 달리 행복은 내가 추구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상태를 누리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 (196)
문장 전문가 아니랄까봐. 동사 형용사 따져주는 거 반갑고요. 서평을 품은 소설 형식 나는 좋은데. 쓰는 사람(소설)은 읽는 사람(서평)이기도 하니까. 특화해서 다른 거장들 작품을 품은 리뷰소설 계속 써주셨으면 좋겠다. 아무튼, 다음에 어떤 글을 들고 찾아와도 내겐 글 잘 쓰는 사람, 김정선 작가다.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는 <베니스의 상인> 첫 문장이자 안토니오의 대사다. 셰익스피어는 읽어도 읽어도 자꾸 잊어버린다고 얘기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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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애호가가 썼단다. 전공자가 애호가를 따라가기 힘든 지점 있음을 안다. 좋아서 썼다는 만큼 흥이…… 있나? 반쯤 읽다가 말아서 단정하지 못하겠다. 다만 메타북은 원작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말 그대로 ‘셰익스피어를 읽자’다. 맛만 보자면 이런 문장들이다.
존 왕은 군주로서, 주인공으로서 매력이 없다는 점이 이 작품의 인기가 적은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덧없는 것이라는 것, 권력이란 좋은 정치로 이어질 때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필립이 부주인공으로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것은 개인의 매력이나 맹점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정치라는 거울을 통해서 인간성을 탐구하고 관찰한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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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쓰지 않고 몰래 읽던 기간에 또 만난 셰익스피어가 있어 묶어 놓는다. 기대하기로는 책 읽는, 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익명의 알코올중독자, 아니 독서중독자 모임이 뭐 이래. 비밀경찰이나 스파이라고라고라고. 황당무계한 가운데 셰익스피어 연극이 대단원을 이룬다. 셰익스피어 희곡들 한 줄 요약은 멋져서 이렇다. ‘판단력이 흐려진 노인네 이야기’(리어왕) ‘질투에 눈먼 중년 아저씨 이야기’(오셀로) ‘우유부단한 유학파 왕자님 이야기’(햄릿)(240). 그 외엔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는 4차원이다. (또는, 3차원적 중독 ‘병맛’이 모자라거나.) 책지름 허영심에 위안을 주는 컷을 마지막으로 끝.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강유원,『책과 세계』(9)
덧글
우선 책을 고르는 시선이 책 앞에 선 단독자세요. 남다르세요.
책 많이 읽는 사람 특유의 유식함(?) or 통찰력도 좋구요.
에르고숨 님만의 중독성 있는 독특한 문어체도 좋아요.
가끔 읽는데 툭툭 걸리는 재미도 있어요. 잠깐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계속 써주세요. 네?
안 쓰는 노잼이 커서 꾸역꾸역 쓰러 올 거라는 취지였는데... 역시 저는 글을 이상하게 써요잉?ㅎㅎ 이상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쓰기의 말들>에 이런 문구도 있었어요. 참 좋았기에 첨부합니다. 최세희 님께 선물로.
‘아주 서서히 글을 쓰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지적이고 공정하며 이성적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것이었다.’ -트레이시 키더 (32/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