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Smoking

 

그리고 개별 작품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라는 이 소설집의 기획 의도에는 아주 적합한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는 이 소설(「불용(不用)」)을 가장 좋아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243, 작가의 말)


바로 저입니다. 「불용(不用)」이 가장 좋았습니다. 어찌나 좋았는지 작가님이 ‘개별 작품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라고 하신 점이 의아할 정도입니다. 왕년에 데이비드 린치 영화를 좋아했던 게 퍼뜩 환기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락픽으로 자기 가슴을 열어 흉골과 늑골이 분리되는 소리를 듣는 장면에서 <이레이저 헤드>를 떠올리고 말았거든요. 헨리가 크리처의 붕대를 자르던 모습 말이에요.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인데 그 장면만 또렷이 생각나요. 그동안 어디 있다가 「불용(不用)」을 만나 다시 살아났을까요. 락픽으로 가슴을 열…… 아니, 아닙니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상자만한 작업실에 개업한 열쇠 가게. 너무나 좁은 곳이므로 책이라곤 시집밖에 펼칠 수 없다는 주인공입니다. 아무 자물쇠도 열 수 없는 열쇠를 깎고, 가슴에는 어떤 열쇠로도 열 수 없는 구멍을 갖고 있으며 끼익 열리는 문소리에서 시를 듣습니다.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를 여는 열쇠를 만들어달라는 사람을 만나 사귀기도 하지요. 퍽 노골적(꽂는 열쇠라니! 꽂히는 자물쇠라니! 꽂을 수는 있으나 열 수는 없다니!)이거나 낭만적(마음을 여는 열쇠?)이지 않으냐고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유치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열 수 없는 열쇠는,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를 열 수 없을 뿐더러 자기 가슴도 열 수 없거든요. 락픽이라는 열쇠 전문가의 도구(이런 것도 좋습니다. 전문가의 장비, 제가 좋아합니다)로 열어본 자기 가슴에는 온갖 쓸쓸하고 아련하고 기쁘고 슬픈 것들이 들어 있는데, 그 부분은 너무 아름다워서(아까워서) 여기 옮기지 못하겠습니다. 요는, ‘닥치는 대로 준비’(243)해줘서 고맙습니다. 처음 만난 임성순 작가, 전작(前作)도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잉여롭게 쓸데없게』는 ‘불용(不用)’과 맥이 닿네요? 쓸데없음, 무용(無用)을 제가 좋아하므로, 곧 또 만날 듯합니다. 


열쇠를 복제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 중 그녀는 처음으로 사라진 열쇠를 만들러 온 사람이었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를 위한 열쇠를 만들 수 있나요?”
그녀는 문 밖에 서서 이렇게 물었다.
“네. 자물쇠가 없어 아무것도 열 수 없는 열쇠도 만들 수 있는 걸요.”
(…)
“일을 안 하실 때는 뭐하세요?”
“시집을 봅니다.”
“시요?”
“네.”
“왜요?”
“다른 책을 펼치기엔 너무 좁으니까요.” (168-169,「불용(不用)」)


 

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9/07/09 17:29 # 답글

    이 작가는 좋은 작품은 좋고 별로인 건 정말 별로였는데, 단편은 또 어떨지 모르겠네요. 요즘 책 사는 게 영 시들해서... 이 책이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 있었으면 좋겠어요ㅎㅎㅎ
  • 2019/07/09 17:5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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