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 나의 삶 + 두 사람 NoSmoking

자본론 이펙트 
프랜시스 윈 지음, 김민웅 옮김/세종서적


<자본론>이 금서는 아니었으나 조심스러웠던 시절, 스터디에서 읽었던 <자본론>은 별 감흥이 없었다, 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자본론>이 금서는 아니었으나 조심스러웠던 시절 내가 너무 무식했었음에 틀림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고 고백한다. 자본주의 비판서를 읽는 주제에 자본주의를 몰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후 <자본론>을 정좌하고 1권이라도 다시 읽은 적 있느냐하면 그렇지도 않고, 다만 그 시절 이후 자본주의 사회를 20년 넘게 더 살았고 <자본론> 메타북을 연달아 두 권 읽었을 뿐이다. 그러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이것이다. <자본론>은 정말 대단한 책이다.


프랜시스 윈은 마르크스 평전을 쓴 이로, 이 책에서는 <자본론> 출간 이전, 출간 과정, 출간 이후를 간략하고도 밀도 높게 소개한다. 내게 가장 좋았던 점은 <자본론> 안에 무궁하게 숨어 있는 마르크스의 문학적 소양과 영감을 짚어준다는 것이다. <자본론>이 금서는 아니었으나 조심스러웠던 20년 전에야 <자본론> 안에서 ‘데모’ 혹은 혁명의 문장만을 찾으려고 애썼지 텍스트 자체를 즐겨보려던 마음이 1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를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환원했던 게 아닌가 싶다. <공산당 선언>과 달리 <자본론>은 ‘팸플릿’이 아닌 걸 몰랐던 거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20년 더 사는 동안에 나는 여타 문학작품을 꽤 만나기도 했고. 나의 20년만이 아니라 <자본론> 이후 150년은 쭉 <자본론>을 ‘재발견’하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를 ‘창조적인 예술가’, ‘변증법의 시인’(14/195)으로 소개하기 위해 프랜시스 윈은 발자크 <미지의 걸작>으로 시작한다. <자본론> 출간 직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하며 “최고로 유쾌한 역설들이 그득한 작품”(7/195)이라고 한 책이다. <미지의 걸작>은 마침맞게 얼마 전 번역되어 나오기도 해서 이게 웬 행운인가 했다. <자본론>이 정치경제 비판서이긴 하나 또한 엄연한 예술작품(훗날 높이 평가될 ‘추상화’)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이 잘 전해진다. 다만, 또 다른 편지 에피소드를 소환하면서 프랜시스 윈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발자크의 작품이라고(14/195) 쓰고 있다. 발자크와 닮았지만 조르주 베르나노스 소설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하여튼.


<자본론>의 안과 밖, 이전과 이후가 짧은 분량 안에 잘도 담겼다. 여러 저작과 사상가들이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진다. 단역들이 무지 많은 오페라다. 하기야, <자본론>만큼이나 할까. 열린 텍스트로 150년 간 읽히고 쓰이고 또 다시 읽히고 새로 쓰이는 ‘미지의 걸작.’ 한국에서 <자본론>이 금서 아니고 조심스럽지도 않은 시절이라니, 좋은 세월이군! 말해보면, ‘좋~은’이라고 읽히는, 초절정 자본주의 현실에서 (‘가격’이 아니라) ‘가치’가 새록새록 보이는 마르크스다. 프랜시스 윈이 소개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인간적인 면모도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무슨 정치적 적대감이라기보다는 내용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론』초판이 출간되었을 당시 반응은 조용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에 대한 반응이 이렇듯 조용하자, “왜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거야? 영 마음이 편치 않군”이라면서 초조해했다. 엥겔스는 책을 널리 알리고자 『자본론』에 대해 공격하는 서평을 독일 신문에 익명으로 내고, 마르크스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135/195)



자본론을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태성 옮김/유유


<자본론>을 새로 읽지는 않고 <자본론을 읽다>를 읽는다. <종의 기원을 읽다> 이후 만나는 양자오 선생이다. 노동, 상품, 화폐, 가치, M-C-M(이 책에서는 G-W-G), 잉여, 착취, 소외 같은 말들을 다시 보니 반갑다. 사례를 들어가며 술술 설명하는 양자오 선생 입담은 여전하다. 자신의 <자본론> 경험담도 함께 풀어낸다. 영어판, 일본어판, 독일어판 <자본론>을 갖게 되는 사연이며 하버드 도서관 얘기는 참으로 좋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하나인데 서술은 제각각’ 꼭지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쓴 바 있는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제3권까지 진지하게 다 읽고 마르크스 노동 이론의 복잡한 전모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그 덕분에 그는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이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 (78/280, 강조는 나)


프랜시스 윈의 <자본론 이펙트>에 의하면 다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제3권까지 진지하게 다’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 텍스트는 몇 대목 정도나 알까 하는 수준이었다’(<자본론 이펙트> 174/195)고, 알튀세르 자신의 회고록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밝힌 바 있음을 알려준다. 같은 책에서 알튀세르가 이어 썼다는 내용이 이렇다. “철학적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어떤 저자의 특별한 사상이나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것을 빼놓고는, 아주 간단한 문장 하나를 가지고도 나는 적어도 이들 저자나 책의 일반적인 흐름이나 방향에 대해 뭔가 주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던가!)”(<자본론 이펙트>175/195) 대단한 능력이고 대단한 용기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가지고 있으니 저 대목을 보면 반갑겠다. 아무튼 양자오 선생도 <미래>는 안 읽었거나 잊은 모양이다.


교환을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 목적이 되는 현상 즉 ‘소외’를 예사로 보고 있는 현재, 마르크스를 만나는 일은 단비 같다. 전해 듣는 목소리이긴 하지만 낡지 않은(않는) 웅변이다. 돈이면 다 되는 썩어빠진 자본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농담이랍시고 걸핏하면 돈, 돈, 돈 타령하는 입들(그래서 716MB를 대통령 만든 거 아닌가)이 왜 이리 많은지. ‘뭣이 중헌지’ 다시 알려주는 마르크스 아닐까 싶다. 노동과 시간과 가치 같은 거. 또한 역사가 그렇듯이 경제도, 어느 입장에서 보고 쓰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할 터. 민중의 편에서, 노동자, 피착취자의 편에 서서 기록하고 변호하는 목소리로서의 마르크스 선생이다.


『자본론』은 노동자의 경제학이자 노동자의 입장에서 출발한 경제 활동 분석이다. 노동자는 노동자 자신의 경제학을 가져야 한다. 자본가는 일찌감치 자본가만의 경제학을 갖고 있는데다 이 경제학을 운용하여 노동자를 미혹시키고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280)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찰스 다윈 지음, 이한중 옮김/갈라파고스


턱수염 긴 할배 사진으로만 익숙해 이 거장이 과연 어린 시절이나 있었을까 싶다만, 십대 시절 회상 챕터를 보면…… 귀엽다. 학창시절은 온통 ‘시간 낭비’에, ‘따분했다’고 하며, 딱정벌레를 모으고 식물을 관찰하고 풍경에 감탄하는 모습이다. 말년에 돌아보며 쓴, 길지도 않은 자서전에, ‘당시에 나는 그다지 열심히는 아니었지만 해양 연체동물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는 내게 진귀한 조개껍데기를 주기도 했다.’(48) 같은 문장이 자리를 차지한다.  『영국 곤충 도해』에 실렸던 자기 딱정벌레(‘C. 다윈님이 수집’)(60) 얘기는 또 어떻고.


거장의 자서전이 짧아 놀라고 담백해 놀란다. 종종 교류했던 유명 인사들에 대한 평가는 가차 없고, 자신이 받았던 공격(“다윈은 관찰 능력은 뛰어나지만 추론 능력은 형편없어.”)에 대한 방어도 있고(‘『종의 기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 논증’)(169) 저 유명한 비글호 여행에 대한 설명은 짧으며(왜냐하면 여행기가 따로 나왔거든), 각 관찰과 실험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없다(왜냐하면 논문들이 따로 나왔거든). 반복하거나 중언부언하지 않는 성격인가 보다. 다윈이 사망한 후 이 짧은 글에서도 가족들에 의해 몇 대목이 삭제되었다는 후문이다. 종교를 언급한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잘 알려진 바, 과학이 교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 탓이겠다. 또한 몇 십 년 전 다윈이 비글호에 자칫 오르지 못 할 뻔한 이유가 코의 생김새 때문이기도 했듯, ‘인상학’ 같은 것이 널리 퍼져 있던 때임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책이 외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지속적인 가치를 가장 잘 검증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이 말에 따르면 내 이름은 앞으로 몇 년은 더 알려질 것이다.’(168, 강조는 나) 앞으로 몇 년이라고! 겸손한 할배 같으니. ‘과학자 풍 글쓰기’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화려하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툭툭 뱉는 글을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다른 말로, 이상하게 감동적이라는 얘기다. 수집벽, 관찰력, 호기심, 실험, 인내로 점철된 삶이지만 아파서 골골하는 세월 또한 길다. 아파서 골골은 아마도 다음 책 <두 사람>에서 실컷 보게 될 듯하다.


예를 들어 이제는 쌍각조개의 아름다운 경첩 부분을 보고 사람이 만든 문의 경첩처럼 지능을 가진 존재가 그것을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유기체의 다양성이나 자연선택의 작용에 바람의 진로보다 더 훌륭한 설계가 내장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101)


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갈라파고스


찰스 다윈 (1809~1882). 종의 기원(1859)
카를 마르크스 (1818~1883). 공산당 선언(1848) 자본론(1867)


세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라기보다는 세 사람이었다면 양자오 선생의 ‘현대고전 정독’ 시리즈와 나란히 놓을 수 있었겠다. 양자오 선생이 19~20세기 유럽 사상의 핵심으로 꼽는 세 사람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다윈,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마르크스, ‘인간과 자아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프로이트. (따옴표 안은 양자오 선생 표현) 그러기엔 프로이트 할배 아니 죄송, 프로이트 청년(1856년생)은 너무 어린데다 대륙에 살았어. 하여튼. 저 두 사람을 가상의 저녁 식탁에 모아 앉힌 사람은 독일 저널리스트 일로나 예르거다.


세 사람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라고 썼지만 예르거에게는 세 번째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아파서 골골거리는 다윈과 마르크스의 건강에 관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만든 허구 인물이 베케트 박사로, 둘을 매개하는 역할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케트에게서 프로이트가 약간 보이기도 한다. ‘신체와 정신의 문제’(83) 접근법 같은 것. 환자에게 직접 물어봐서 마음을 열게 하거나 ‘최신’ 약품을 사용하는 등 아주 재능 있는 의사로 등장한다. 다윈의 오래된 전속의이고, 가난하고 아픈 마르크스에게는 엥겔스의 부탁으로 소개되었다. 소설에서 비중이 마르크스보다 더 크다.


예컨대 ‘마르크스 코끼리설’( ‘『내셔널 리포머(National Reformer)』의 발행인이자 급진적인 언론인인 피터 폭스는 독일어 『자본론』을 대하면서 마치 코끼리를 얻어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자본론 이펙트>, 140/195)을 베케트 박사가 읊는다거나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에서 다윈이 결혼을 고민하며 작성한 결혼 이점과 단점 목록은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 예르거에게는 다윈과 마르크스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말겠어, 하는 의지가 은연중에 있었다고 할까. ‘설명충’으로 마침맞은 캐릭터 되겠다.


다윈에 대해 오랫동안 읽고 써온 저자답게 다윈의 말년을 충실하게 그렸다. ‘과묵한’ 자서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렁이 관찰과 식물 실험, 그리고 물론 아파 골골거리는 장면도 무척 안타깝다. 같은 시기 가까운 곳에 있었던 다른 털북숭이 거장이 <종의 기원>을 읽었을 뿐 아니라 헌사를 적어 <자본론>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흥분했을지 상상이 간다. 게다가 이쪽 털북숭이가 저쪽 털북숭이에게 감사 인사 편지까지 보냈음을 확인한 순간 ‘마르크스가 이 책에 미끄러져 들어왔다’(353)고. 감동. 그런데…… 아아, 둘은 만나지 말아야 했다.


예를 들어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는 서로 만남 없이 같은 날짜만 제시하고도 숱한 이들을 연결 지어 상상해보게 했다. 때로는 곁에서 혹은 거의 스치듯 이이는 이러고 저이는 저러고 하는, 공시적 그림이 너무나 멋졌던 경우다. 다윈과 마르크스가 1881년 ‘겨우 20마일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사실’(353)이 가슴 뛰지, 신부(神父)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는 (유신론 패배의 은유인가? 웃어도 되는 건가?) 사건 밖에 없는 저녁 식사는 그야말로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제가 소개 드려도 될까요? 마르크스 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이십니다. 런던에 거주하시고, 현 시대에 경제학에 관한,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을 쓰셨습니다.”(221) 음. 그랬습니까. 마르크스 선생의 굴욕은 그렇다 치고 엠마 다윈이 엄청난 민폐 캐릭터가 되어 버리는 저녁 식사다. 아아. 두 사람은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세 번째 아사코 마냥.


“다음 세기에는 선생님이 자연과학을 교회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 영웅으로 추앙받게 될 거라 예언해 봅니다.” 이 말로 베케트 박사는 인사를 대신하고, 며칠 안에 다시 왕진을 오겠다고 약속했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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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9/02/26 03:4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9/02/26 11: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다락방 2019/02/26 16:41 # 삭제 답글

    왜 이글루스에는 좋아요 혹은 추천 버튼이 없나요. 이 글은 뭔가 막 좋아요!! 누르고 싶은데 말입니다 ㅜㅜ
  • 에르고숨 2019/02/26 17:20 #

    :) 좋아요 10개 받은 기분이에요. 고맙습니다락방 님.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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