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얘기만 나오는 줄 알고 기대 없이 열었는데 세상에. 알코올중독자가 나온다. 걸 온 더 트레인 위드 알코올. 바람직하지 않게도, 술이 몹시 당긴다. 그래서 같이 마셨다. 레이첼의 만취 바보짓과 숙취 후 자책감에도 함께 부끄러워했다. 구멍 난 진실과 왜곡된 기억과 그걸 이용하는 거짓말쟁이가 적재적소에 배치된 스릴러다. 이혼, 실업, 불임, 알코올의존, 인생 낙오자로 여겨지는 레이첼의 핍진성이 어찌나 뛰어난지, 심지어는 독자들에게도 비호감인 모양이다.
그러니 어쩌랴, 나로선 더 격려하고 안아주고 싶다. 집착과 집요함이 징글맞다 싶다가도 결국 각성에 이르고 자신을 찾으며 진실을 밝힌다. 알코홀릭 가스등 이펙트 정도 되겠다. (술꾼에게는) ‘익숙한 물건 하나’(505/521)의 반격이 통쾌하다.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프로이트 할배한테 한 방 먹이는 듯도 해서 깔깔 웃었다. 레이첼을 이대로 안아줘도 될지, 다음 폴라 호킨스로 내처 가 본다.
“당신이 날 속인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당신은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했지. 당신은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믿게 만들었어. 당신은 내가 괴로워하는 걸 지켜보고, 당신은…….” (478/521)
옳거니. 더 길어지고 더 깊어졌다. 위선과 위력, 거기에 휘둘리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바깥에서 온 사람, 오해를 풀고 성장하는 사람이 골고루 등장한다. 폴라 호킨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거나 조종되는 심리를 잘 아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마녀사냥을 소재로 삼았다. 강을 낀 마을이 배경이다. 작가이자 사진가인 넬이 죽기 전까지 쓰고 있던 글 제목도 ‘드라우닝 풀Drowning Pool’이다. ‘벡퍼드는 자살 명소가 아니다. 벡퍼드는 골치 아픈 여성들을 제거하는 곳이다.’(142/600)
‘골치 아픈 여성’ 즉, 침묵하지 않는 여성,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여성, 진실을 밝히려는 여성 등이 되겠다. 쉬운 단문으로 슥슥 진행하는 솜씨가 끝내준다. 다만 각 챕터들이 제목으로 달고 있는 이름이 화자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게 약간 산만하다고 할까. 연대와 자매애는 전작과 다르지 않고 거기에 더해 화해, ‘가족의 탄생’까지 이룬다. 서로 안아주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덜 외롭다. 든든한 폴라 호킨스다. 안아도, 안겨도 좋을 작가. 제가 한 패악질에 대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을 그냥 뚝 끊어내어 이후를 알려주지 않는 점도 멋지다. 안물안궁, 개자식아, 식으로.
추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네 첫 남자였잖아, 응? 오래전 얘기네.”
그가 웃었다.
첫 남자?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아니, **.”
놀랍게도 내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또렷하고 크게 나왔다.
“네가 내 첫 남자였던 게 아니야. 네가 날 강간했지.” (392-393/600)
덧글
답이 늦었네요. 미안함미다. 제가 좀 심하게 아팠어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