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의자 Smoking

 
열두 개의 의자  - 8점
일리야 일프.예브게니 페트로프 지음, 이승억 옮김/시공사


1942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세계 초연. 행진곡 주제에서 쿠이비셰프 청중은 다가오는 전쟁과 히틀러주의를 들었다. 그 속에는 예브게니 페트로프도 있었다. 교향곡을 듣고 이렇게 얘기했던 사람이다. “하나, 둘, 왼쪽, 오른쪽. 사람처럼 똑똑한 기계들, 기계처럼 무정한 사람들이 우리의 국경으로 다가왔다. (…) 홀을 뒤흔든다. 철로 된 기계가 인간의 뼈를 짓밟고 지나간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분은 주먹을 쥔다. 여러분을 향해 행진해 오는 함석 주둥이를 가진 이 괴물을 처치하고 싶다.”(<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402-404) 다름 아니라 ‘쇼스타코비치가 가장 좋아했던 소비에트 유머 작가 일프와 페트로프 듀오의 한 명이다.’(같은 책, 미주)


유일한 번역본이 <열두 개의 의자>다. 방구석에 쟁여놓은 책무더기가 소용없지 않아서, 바로 찾아 읽었다. ‘유머’라고 해서 웃을 준비했던 걸 후회한다. 생각해보면 ‘유머작가’와 ‘풍자작자’를 구분 없이 쓰는 듯도 한데, 풍자를 알아야 유머가 온다는 함정이 있다. 내 경우 굉장히 슬프고 씁쓸한 웃음을 짓기는 했다. 8할은 해설의 도움이다. 1920년대 러시아를 간결, 명료하게 잘 설명해준다. 작품 배경의 바로 그 시절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했는데, 사유 재산 탐욕은 잔재했던 상황. 거기에 더해 제정 러시아에 대한 향수와 관료주의까지. 그야말로 소비에트 러시아 과도기의 온갖 모습이다. 의자가 왜 한 개가 아니고 열두 개인지 알만하다.


주인공 이폴리트 마트베에비치 보로뱌니노프는 제정 러시아 시절 귀족이었다. 혁명 이후 파리로 망명가지 못하고 남아 공공기관에서 일한다. 따분하고 소박한 일상이다. 같이 살던 장모가 사망하면서 귀중한 비밀을 알려준다. 문제의 의자들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몰수당하여 어디론가 흘러간 1/12 의자 속에 보석을 숨겨놓았다는 사실. 본격 모험이 시작된다. 옛 귀족 한 사람만으로는 러시아 실상을 잘 보여줄 수 없었을 터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이거든.) 아무 데서나 굴러먹던 사기꾼 능구렁이 생활인 오스타프 벤데르가 합류한다. 열두 개 의자 행방은 러시아 곳곳 열두 개 (아니, 그러면 너무 작위적이니까, 여러 개) 실상을 보여주게 된다. 이념으로 무장한 듯하나 실은 욕망으로 움직이는 인간 군상에 다름 아니다. 리얼리즘 맞다. 작품 외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냐는 물음은 당시 있었을 법하고 당연히 스탈린 문화정책 하 <열두 개의 의자>는 출판 금지됐다.


‘유머작가’라는 수식어가 오면 웃을 준비보다는 역사와 맥락을 준비해야 함을 알겠다. 깔깔 웃음보다 자칫 눈물이 흐르기 십상임을 알겠다. 그러다 비로소 ‘블랙유머’라는 말을 쓰게도 되겠고, 웃음이 얼마나 한 무기인지도 따라서 알겠다. 역자의 해설이 좋다고 다시 덧붙이면서 한 가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세계 초연은 1942년 3월 5일에 있었다. 해설 (2권) 286쪽에서 ‘사진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페트로프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통신원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2월 전선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달이 잘못 쓰인 듯하다. 죽은 페트로프가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을 들었다면 너무 극적이잖아. (책날개에는 사망일이 7월 2일로 되어 있다.) 세기의 교향곡 초연 청취 이후 불과 4개월을 더 살았던 예브게니 페트로프다. 슬픈가? <열두 개의 의자>에서 내가 본 ‘유머’가 바로 그랬다.


“인생이 걸린 일이야!”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가 다시 말했다. “커다란 희생을 요하는 일이고…….”
“인생! 희생!” 오스타프가 말했다. “당신은 인생과 희생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의 저택에서 쫓겨난다면 인생을 알았다고 생각하시겠죠? 또는 진짜배기 중국산 꽃병을 압수당한다면 그걸 희생이라 생각하시고요? 인생은 복잡한 농담 같은 겁니다. 그런데 이 복잡한 농담은 또 한편 서랍을 열듯 간단하게 해결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그 서랍을 여는 방법을 아는 거지요. 서랍을 여는 방법을 모르는 자가 바로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혹시 경기병이자 고행사제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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