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2만 리 Smoking

해저 2만리 - 8점
쥘 베른 지음, 김주경 옮김/시공주니어


원제 중 거리를 나타내는 ‘vingt mille lieues’ 는 20,000리외(lieue, 4km)로, 80,000km다. 리외를 우리 단위 리(里, 400m)로 곧장 옮겨 20,000리라고 하면 8,000km밖에 안 된다만. 굳어진 제목이어서 그냥 쓰는 모양이다. 혹은 일본식 리(4km라고 한다)를 그냥 가져온 건지도 모르겠다. 태평양, 인도양, 홍해, 지중해, 대서양, 남극해와 북극해를 두루 돌아다녔으니 80,000km는 족히 될 터, 우리 리를 고수하려면 ‘해저 20만 리’…… 입에 안 붙잖아. 아무튼.


바다 곳곳에서 선박 침몰 사고를 일으키는 괴생물체, 크라켄이나 일각고래는 맥거핀이었음을 금세 알게 된다. 곧 N자 돌림 모 선장과 틸러스호가 등장하여 우리의 아노락스 박사와 콩세유, 네드 랜드 일행은 지구 바다를 일주하게 된다. 과학소설을 빙자한 여행기, 혹은 충실한 바다 탐험기다. 과학자 아니랄까봐 호기심 맹렬하다. 온갖 동·식·광물 해류를 망라한다. 그 중에서도 물고기에 관한 한 거의 백과사전 급…… 맛있는 생선까지 알려준다. 번역하기 정말 까다로웠겠다.


바다 풍경, 특히 노틸러스호 창문으로 보이는 심해가 가지각색 멋지다. 물론 폐소 공포증 없다면 말이다. 숨이 턱 막히는 장면이 한 번 나오지만, 맥락상 마음 놓고 볼 수 있다. 인물들 간 갈등도 스릴이 없기는 매한가지, 맥락상. <해저 2만 리>는 아주 건전한 지구 바다 안내서이거든. 안성맞춤인 멤버 구성만 보아도 그렇다. 수수께끼 인물 네모 선장, 과학자 아로낙스 박사, 충실한 하인 콩세유(‘주인님 뜻대로 하세요.’ 19세기라니까), 강인한 뱃사람 네드 랜드. 애지중지 혹은 티격태격 약간의 갈등 요소를 끼워 넣은 게 귀여울 정도다. 줄곧 탈출을 머릿속 한 구석에 두고 있으면서도 바닷속 탐험이 즐거워. 바다를 다 돌고 나니(할 말 다 하고 나니) 짠. 신기하게 모두 해결. 단 한 가지 남은 건 네모 선장의 신비로움이다.


어쩌면 나는 네모 선장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이 남자가 단순한 과학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네모 선장과 그의 동료들을 노틸러스호 안에 묶어 두고 있는 것은 평범한 염세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는 괴물 같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한 증오심이었다. (732)


네모 선장의 여운이 아니었다면 이 긴 여행기가 무척 밋밋했을 듯하다. 왠지 공상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고 싶은 과학소설 맛이라고 할까. 지도를 띄워놓고 보면 더 재미있을 터인데, 내 경우 게을러서 자주 그러지 못했다. 지구본이 갖고 싶어졌다. 읽을 분은 팔이 닿는 거리에 지도나 지구본 또는 인터넷을 두길 적극 권한다. 괴생물체를 찾는 에이브러햄 링컨호 초반 여정을 빼면 아노락스 박사 일행이 노틸러스호에서 보낸 여행 기간은 거의 반년이다.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혹은 지구 바다와 육지 비율이 어떤지 쥘 베른만으로도 알 수 있다. 80일 간의 세계 일주 : 180일 간의 바다 일주. 대략 3 : 7 (억지로 찾아냈지만 훌륭한데!) 공교롭다. 소설 길이로는 그렇지 않다. 2만 리가 80일의 두 배도 되지 않는, 겨우 767쪽. 여름날 뒹굴뒹굴할 때 끼고 있기 참 좋다. 더우니까 시원한 발췌문도 하나.


얼음으로 이루어진 산은 빙산, 얼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얼음벌판은 빙원 또는 빙야, 떠다니는 얼음은 부빙 혹은 유빙이라고 부르고, 유빙이 모인 곳을 부빙군이라고 부른다. 부빙군 중에서도 유빙이 둥그렇게 모여 있으면 ‘패치’, 즉 연엽빙이라고 부르고, 길쭉하게 줄 서듯 모여 있으면 ‘스트림’, 곧 빙천이라고 부른다. (583)



                                                자몽주스 : 소주 = 3 : 7 (유빙자몽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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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8/08/21 16:00 # 삭제 답글

    오! 자몽소주 ㅋㅋㅋ 제가 진짜 애정하는 조합이에요. ㅋㅋ 비율도 ㅋㅋ 달지 않게!
    암튼 얼마 전에 해저 2만리 얘길 애인에게 해주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여기서 리뷰를 딱 만났네요. 신기.. 원제를 몰라서 애인에게 대충 설명해주며 물어보다가 자연스레 -리 (4km)를 사용했나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일본번역을 다시 한국어로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렇게 건너건너 온 게 아닐까요..
  • 에르고숨 2018/08/23 00:16 #

    이히히히히 건배용! (지금 또 맨들어 왔음.)
    책이 세상에 그렇게 많아도 비슷한 시기 같은 책을 언급하거나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게 참 신기해요. 생각해보니 저는 쥘 베른 처음 읽었더라고요. 그 흔한 축약본도 안 읽고 어릴 때 뭐 했지, 했네요.ㅎㅎ 리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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