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무브+인섬니악 시티 NoSmoking

온 더 무브 - 10점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알마


인생 참 길고도 밀도 높다. 실제 ‘온 더 무브’한 삶이기도 했고 빼곡한 기록 덕이기도 할 터다. 늘 움직이는on the move 나날을 기록하고, 기록하느라 바쁘고. 낭만주의 과학자이자 글쟁이 의사 올리버 색스 자서전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깨어남》에 이어 마지막 인사 《고맙습니다》까지도 읽은 차이지만 역시 가장 큰 울림을 준 작품은 본인 이야기라고, 이제 말하겠다.


어린 시절 런던, 1960년대 캘리포니아, 이후 뉴욕까지. 올리버 색스 82년 일생을 이룬 가족과 친구와 환자와 동시대 지식인과 애인 들, 젊은 시절 활력과 노년의 병까지. 어쩌면 여태 자신이 써왔던 병례사를 자기에게로 돌려 쓴 것도 같다. ‘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절로 상상되는 바, 화학적 도취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암페타민에 절어 살았던 경험과, 지적 성장을 이룬 계기들은 읽기만 해도 왠지 머리에 모락모락 연기가……가 아니라 나까지 충만해진다.


특히 색스가 루리야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공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루리야를 낭만주의 과학자의 창시자로 우러르기만 한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그이와 지적 교류를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한 영광이었을까. 충분히 이해 가는 ‘지적 보증’(251)이다. 자신의 평생 글쓰기 방식이 확고하게 선 계기이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환자를 단지 큰 통계 속 한 개체로만 취급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각자, 전체 삶으로 접근하는 방식 말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색스의 임상 방식이자 글쓰기 방식. 젊어 우러른 지식인이 있다면, 차차 색스 자신이 우러름 받거나 또는, 원전의 저자가 되기도 한다. 《깨어남》의 다큐 버전 <어웨이크닝>과 영화 <사랑의 기적> 말고도,


1982년 초에 런던에서 소포가 하나 왔다. 극작가 해럴드 핀터(1930~2008)의 편지와 《깨어남》에 영감을 받아서 썼다는 새 희곡 <일종의 알래스카A Kind of Alaska>가 들어 있었다. (…) 지난해 어느 여름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이 희곡의 첫 대사가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는 이어지는 며칠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저절로 써졌다”고 했다. (383-384)

 


《해롤드 핀터 전집 8》127쪽


‘무슨 일인가 있어나고 있어,’ 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핀터 희곡 <일종의 알래스카>에서 29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데버러(데보라)가 깨어나면서 처음 한 말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얼어붙었던 기간을 ‘일종의 알래스카’라고 한 것이겠다. 핀터는 희곡에서 ‘올리버 삭스’와 엘도파L-DOPA 약물을 언급한다. 연극 공연 관람 후기는 《온 더 무브》에서 색스가 쓰고. 지적 교류 혹은 과학자와 문학가 사이 영향·영감이 참 좋다. 과학자이자 예술가, 따뜻한 의사 올리버 색스는 스스로를 ‘이야기꾼’(476)이라 말한다. 그이가 자서전을 쓰던 무렵에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랑. ‘사랑의 기적’이 그이를 깨우기도 했고 편히 잠들게도 했다. 빌 헤이스를 이어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빌리의 책 《해부학자The Anatomist》의 교정쇄를 읽고 깊이 감명 받아 혹시 동부에 올 일이 있거든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2008년 9월에 빌리가 뉴욕에 오면서 정말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진중하면서도 밝은 빌리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솔직함과 섬세함이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474)



인섬니악 시티 - 10점
빌 헤이스 지음, 이민아 옮김/알마


 

빌 헤이스와 올리버 색스는 둘 다 (따로!) 내가 좋아하던 이야기꾼들이다. 《고맙습니다》에서 빌 헤이스 이름을 보고 아이, 이런 사랑꾼들 같으니, 사랑스럽기도 하지, 했던 기억이 있다. 빌 헤이스의 16년 동반자 스티브의 죽음을 알게 된 《해부학자》이후 안부를 전해온 《인섬니악 시티》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온 더 무브》후반부와 나란히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장면. 똑같은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헤이스에 의하면 22일).


《온 더 무브》472쪽+《인섬니악 시티》70쪽



‘당신을 향한 깊은 사랑을 잉태’한 점과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차이. 여태 읽어온 색스와 헤이스를 보면 누군들 연결해주고 싶지 않을까. 둘의 글쓰기가 묘하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의학 에세이 틀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 안에서도 구체적인 사례 즉 개인사를, 전체 즉 이론과 엮어서 쓰는 방식 말이다. 주거니 받거니 둘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얼마나 풍부했을지 가히 상상이 간다. “스티브한테도 이렇게 해줬어?” “그랬죠. 그랬어요.”(325) 둘이어서 다행이고, 다정한 둘이어서 부러웠고 이야기꾼 둘이어서 고마웠다.


헤이스의 책은 피, 불면증, 해부학에 이어 이번에는, 엄밀하게는 뉴욕이다. 사진과 짤막한 일화, 일기 들로 소개하는 뉴욕. 물론 ‘O’(올리버)와의 기록이 가장 돋보이지만 잠시 스치거나 종종 만나는 뉴요커들 이야기도 따뜻하다. (한 가지, 헤이스의 사진들은 좋은데 붙인 캡션이 매우 후지다는 사실은 언급해야겠다. 겨울나무 사진에 ‘겨울나무’라고 제목 붙이는 건 동어반복에 다름 아니다. 캡션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 법하다.) 일기를 꼭 써야한다는 O의 충고를 즉시 실행한 점은 무척 사랑스럽다. 색스의 재치는 본인의 자서전에서보다 오히려 헤이스의 일기에서 더 많이 보인다.


2015. 7. 7
나는 하루에 팔굽혀펴기를 50회씩 두 번 하는데, 그럴 때면 O가 책상에 앉아서 그 번호에 해당하는 원소 이름으로 수를 세어준다.
“타이타늄22, 바나듐23, 크로뮴24, 망가니즈25, 철26, 코발트27…” (315)


‘온 더 무브’한 삶, 색스가 쓴 자서전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헤이스가 따로 쓴 뉴욕일지가 화음을 넣어주는 듯, 협주곡은 완성된다. 협주곡이라니 무엇에 관한? 뉴욕과 색스. 한 육체가 쓸모를 다해 저무는 광경, 그저 슬프지 않고 아름답다. 읽고 쓰고 수영하고 자연에 감동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자 하는 열망은 여전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안타까움도. 색스에서는 못 보고 헤이스에서 보는 장면 또 하나.


2012. 4 날짜 없는 날의 기록
O는 크기가 맞지 않게 튀어나온 악보의 끄트머리 부분을 자르려고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까닭에 완전히 헛짚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허공에 가위질을 하는데, 가슴이 메는 장면이었다. (…) O가 그 종이를, 그 음악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아주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있다가 내가 그의 손을 살그머니 움직여서 자르려고 하는 종이를 자를 수 있게 해주었다. O는 고맙다고 말했다. (129)


몸이 쓸모를 다해갈 때 옆에 (주거공간으로 정확히는 같은 건물 세 층 위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해줘서’ 얼마나 든든했을까. 색스가 사랑해서, 내가 외롭지 않고 고맙다. 둘이 만난 데에는 각자의 저작들도 한 몫 했겠지만 주된 요인은 뉴욕이다. 연인이 되었을 때 헤이스 인생보다 더 오래 뉴욕에 살고 있던 사람이 색스. 뉴욕 삶으로 치자면 새내기인 헤이스조차 이미 뉴욕을 ‘떠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346-347)고 쓴다. 뉴욕, 나는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누군가 이렇게 얘기한 건 기억한다. ‘뉴욕은 미국이 아니야.’ 그러나 미국 비자 받아야 하는 건 여전해서, 내게 뉴욕은 멀고 이야기꾼들만 가깝다. 사랑도, 아마.


2013. 2. 9 밤 11시 15분
나는 O의 잠자리를 준비해준다. 양말을 벗겨주고, 자리끼를 마련하고, 수면제를 갖다 주고, 뭔가 읽을거리를 갖춰둔다.
나: “더 해드릴 게 있을까요?”
O: “존재해줘.” (192)


《온 더 무브》헌사+《인섬니악 시티》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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