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여름을 이 하루에 Smoking

온 여름을 이 하루에 - 8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아작

 

우리가 한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핼러윈이 어떤 존재였는지, 에드거 앨런 포가 누구였는지, 병적인 암흑을 얼마나 찬미했는지 기억할 수만 있다면! 친구들이여, 우리 불타버리기 전에 아몬틸라도를 한 잔만 더 마시자. 이 모든 기억은 지구 상 단 하나 남은 최후의 두뇌에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 밤 온 세상이 죽어간다. 제발, 한 잔만 더. (87-88,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서정이 넘쳐흐른다. 그리움이 한가득. 할머니 냄새부터 내 어린 시절 햇볕까지 문득 생각하게 하는 희한한 SF다. 회상에 잠겨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꿈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판타지 소설에 가깝지만 서지분류 SF이고 나아가 레이 브래드버리 작품을 ‘서정적 과학소설’이라고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된다. 14개 단편 중 「그분」은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서「그분이 오셨습니다」로, 「백만 년 동안의 소풍」은 『화성 연대기』에서 「백만 년짜리 소풍」으로 만났던 작품이다.


미래 사회에서 혼자 되살아난 시체, 고독한 산책자, 소년을 아들 삼아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노파, 어떤 어른도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 소녀, 영원히 소년으로 머무는 아이 등 외로운 이들이 슥 나타났다가 총총 사라진다. 어쩜 이렇게 모두 등을 토닥토닥해주고 싶은 사람들인지. 브래드버리 표 화성과 금성도 당연히 등장한다. 표제작 배경이 금성인데 아, 너무 슬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금성에 7년 만에 태양이 얼굴을 드러낸다. 제목 그대로 가장 짧고 가장 슬픈 작품이 「온 여름을 이 하루에」가 아닐까 싶다. 한편「어서 와, 잘 가」속 영원한 소년 윌리는 열두 살로, 할란 엘리슨의 다섯 살 제프티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껴보는 재미가 크다.


나는 매일 학교가 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더라. 누가 학교 정문 밖으로 꽃다발을 던지는 것 같아. 어떤 느낌이니, 윌리? 영원히 젊다는 건 어떤 느낌이야? 화폐 주조소에서 갓 찍어낸 반짝거리는 은화처럼 보이는 건 어떤 기분이니? 행복하니?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괜찮은 거니?” (147, 「어서 와, 잘 가」)


귀여운 넌 뭐냐.



아, 『멜랑콜리의 묘약』스포인갑다. 원서 한 권을 분권한 순서상으로 『멜랑콜리의 묘약』이 상권인 셈인데 왜 나는 하권을 먼저 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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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집에서 문득 본 진실 : 피터 팬 2017-12-19 00:03:58 #

    ... 은 자란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41,『피터와 웬디』)이때(1900년대 초)만 해도 ‘단 한 명’이었겠다만 지금은 할란 엘리슨의 제프티도 있고 레이 브래드버리의 윌리도 있다. 자라지 않는 아이 테마는 어른다움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치일 터다. 세속성과 순응이랄까. 꿈과 희망과 순수성의 결핍. 더 나아가보자면, 억압되는 이기성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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