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혹은 Call Me by Your Name Smoking

그해, 여름 손님 - 8점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잔(도서출판)

 

그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의 후회도 없다. (…)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감히 헤아려 보지도 못했고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지만 굳이 이정표를 살펴보고 싶지 않았다. (…) 내가 나중에 이 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훨씬 더 잘 살 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내 방에서 보낸 오후마다 내가 순간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기억할 것이다. (201-202)


여름이 끝나기 전에 읽으려 했고 거의 그리 되었다. 회상 형식의 문장에서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계절상으로 여름이자 인생 여정에서 여름날이랄 수 있을 17세에 겪는 뜨거운 사랑. 이탈리아 해변, 휴가, 지적이고 열린 엘리트 부모, 손님들, 여름.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의 배경이다. 그러니 자, 사랑이 올 때다.


그가 내 반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사이프러스 길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까지 누가 내 옷을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 행위에 육체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가까이 있는 것도 모자라 서로가 되고 싶다고 서투르게 말하는 방법이라고. 그래서 내가 내가 되는 것. 나 때문에 그가 그가 되는 것. (…) 이식 수술 후 타인의 심장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 준다. (178)


그리고 갈 때.


“뭐 하고 있었어요?”
“생각.”
“무슨?”
“이것저것.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랑 가을 학기에 가르칠 수업. 책. 너.”
“나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요?” 그가 놀리듯 따라 했다.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고요?”
“다른 사람 생각은 안 하고.”
(…)
“저기를 내다보면서…….” 그가 지평선을 가리켰다. “2주 후에는 컬럼비아로 돌아갔겠구나 생각했어.” (192-193)


제한된 시간이란 거. 그러니까, 끊어놓은 비행기표나 기차표가 있는 상황이 순간들을 더 극적이게 했던가? 아마, 무척, 매우. 절정에서 일시정지해주는 장치이기도 할 터이다. 끊어놓은 왕복표가 있을 때 무례해지는 경우는 본 적 없다. 내 ‘여름 손님’들을 생각해보아도. 함께 하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줄어든다는 압박감밖에는 받지 못했고 서로 질리거나 지루해하거나 무례해지지는 않았지 싶다. 무제한의 시간 안에서는 절정의 순간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함을 피차 알기 때문일까. 그 순간을 오염하지 않고 간직하느냐 아니냐가 관건이겠다.


가을을 맞은 엘리오인데, 절정을 하나도 잊지 않은 엘리오이더라. 순수하고 아름다운 느낌은 그 덕인가 보다. 아아 회상 형식의 소설은 조심해야 한다. 슬프거든.


“이 수영복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옷장을 닫으며 말했다.
“뭔데?”
“기차에서 말해 줄게요.” 그러나 지금 말해 버렸다. “나한테 저걸 주고 간다고 약속해요.”
“그게 다야?”
“오늘 계속 입고 있어요. 입고 수영하지는 말고.”
“역겨운 변태 같으니.”
“역겹고 슬픈 변태예요.”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데.”
“펄럭이 셔츠도 가질래요. 에스파듀도요. 선글라스도. 그리고 당신도요.” (205-206)


당신도요. 내가 가진 당신은 정작 자유로운데 당신을 가진 내가 내게 스스로 하는 다짐인 듯. 그러니까, 당신을 가질래요, 했을 때 더 제약 받는 이는 발화자이겠고 엘리오는 충실했다. 총명한 17세는 37세에도 총명하다. 무엇보다, 기억한다. 사랑은 기억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자기와 함께 나누지 않은 올리버의 경험을 질투하는 엘리오는 그러므로, 옳다. 함께 보낸 시간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나는 참 좋던데, “나도 로마. 나보나 광장에서 동이 틀 때까지 함께 노래 불렀을 때.”(291)라는 올리버의 답.


<Fenesta ca lucive(불 꺼진 창)>을 로마 골목길에서 술 취해 형편없는 이태리어로 함께 부르는 느낌. 무언지 잘 알겠는 나의 이 늙음. ‘<몰다우>에서 영감 받은 건가? 다시 생각해 보니 벨리니의 <몽유병 여인>에 나오는 아리아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255)한 나폴리 민요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도 영화 <데카메론>에서 사용한 모양이다. 파솔리니 사진이 들어간 클립도 탐났지만 로베르토 무롤로 버전을 첨부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이 장면을 읽으며 듣고 있다’는 누군가의 댓글 때문이다.


어느 날 기적처럼 화가를 만나 서로 물어본다면, “도빌”이 내 답이다. 그러고 보니 탄신년 반세기 기념 해에는 정선생과 도빌 가기로 약속한 기억이 나는군.




https://www.youtube.com/watch?v=OvOVryWwaj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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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7/10/01 22:35 # 답글

    이 소설, 완전 제 취향저격인 것 같아요! ^^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기를... 책 읽는 게 제 의지가 아닌 것 같아요ㅎㅎㅎㅎㅎ
  • 취한배 2017/10/02 01:25 #

    사다리 님 의지가 아니고 책의 의지?ㅎㅎ 이 책이야말로 완전 사랑 이야기예욤. 게다가 슬픔주의.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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