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하는 여자들 Smoking

혁명하는 여자들 - 10점
조안나 러스 외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멋진 여성작가들을 다 모아놨나 싶은 단편선. 아작의 훌륭한 라인업 중에서도 한 손에 꼽겠다. 각양각색의 열다섯 작품,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하루 한 편씩 읽어도 좋을 듯. 매일 다른 꿈을 꾸게 하리라. SF라고 하면 주로 생물, 생명, 로봇, 우주 과학에 한정하기 쉬운 터라, 극작가 이력을 달고 있는 켈리 에스크리지의 작품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과학소설에서 연극 연출가 주인공을 만나본 적 없기도 하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살로메>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이기도 해서이겠다.


“요한을 연기할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사람이 어떻게 오줌을 누는지, 턱을 면도하는지 따위는 정말 상관없어.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 (170,「그리고 살로메는 춤을 추었다」, 켈리 에스크리지)


살로메 역할 못지않게 요한 역할을 흠 없이 소화해내는 조를 보면서 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의 신비한 매력. 살로메의 치명적인 춤과도 맥락이 닿아 더 강렬하다. 발췌 문장을 보면서 몇 년 전 어떤 작자로부터 받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남자 작가가 쓴 원서는 남자 번역가가 옮겨야 하고 여자 작가가 쓴 원서는 여자 번역가가 옮겨야한다는 게 자기 생각인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도 멍청한 질문이라 깜짝 놀란 다음에, 성별까지도 옮기는 게 훌륭한 번역이고, 그건 번역가의 생물학적 성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여성성, 남성성은 우리 안에 다 갖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두 성별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니라고 이 작품도 말하는 듯해서 통쾌하고 매력적이다.


역자도 언급하듯, 생각해보면 사회적 약자, 소수, 또는 그들에 공감하여 변화를 꿈꾸는 이들 놀이터로 마침맞은 게 SF 아닌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SF 작가들은 어김없이 그래왔고. ‘혁명하는 남자들,’ 발끈할 필요 없다. 내 해방은 네 해방이기도 하니까. 금성에서 왔느니, 화성에서 왔느니 하는 헛소리 말고, 지구 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영장목-사람과-사람속-사람종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혁명하는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어렵게 읽히고, 리뷰들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으나 뭔지 모를 신화-지구-우주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캐서린 M. 밸런트에서 긴 발췌문 하나 더.


그 SF 작가가 남편을 만났던 그날, 그녀는 말했어야 했다.
“엔트로피 법칙은 모든 것에 해당돼. 그렇지 않다면, 그 어느 것에도 아무 의미가 없을 거고, 기체 거인들이 형성되는 일도 없을 거고, 기름기 낀 지질 거품들도 없을 거고, 입자든 파장이든 빛도 없을 거고, 8월 오후마다 하데스의 말 같은 검은 차 안에서 소년과 소녀가 만나지도 않을 거야. 난 네 안에서 내 젊음의 열역학적 죽음을 봐. 넌 너 자신보다 빠르게, 경험 나누기 기억 나누기 중력 나누기 특이점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고, 그 위에 너 자신 나누기 젖은 콘크리트 나누기 판유리 나누기 탄생 나누기 SF 작가들 나누기 모든 것의 종말을 형성할 수 없어. 삶은 그 자체로 무한히 나뉘어. 삶은 0에 수렴하지만 절대 0에 닿지 않아. 페르세포네의 속도는 일정해.” (289,「시공간을 보는 열세 가지 방법」, 캐서린 M. 밸런트)


주옥같다. 무슨 의미이냐고? 나도 모른다. 너, 이 몹쓸 자식아! 정도라는 것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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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비로그인 2017/08/31 17:21 # 삭제 답글

    제목보고 혹시 여성운동가 전기인가 했는데 단편소설집이었군요.
    제가 아는 여성 SF작가라고는 로저 젤라즈니밖에 없는데, 특유의 짙은 마초성에 아이러니를 느끼고는 했던지라 저런 제목을 들고 나오는 글들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취한배 2017/09/02 04:13 #

    제목에서 그런 느낌이 들지요?ㅎㅎ
    로저 젤라즈니를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비로그인 님 덕분에 영영 안 읽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이어트 고맙습니다. 근데 저는 이이를 남자로 알고 있는데 말이죵; (확인)남자인 것 같습니다. 놀고 오느라 답이 늦었습니다. 양해 바라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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