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NoSmoking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오생근.조연정 엮음/문학과지성사


46 빈손

당신을 원하지 않기로 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떠돌이가 돼 그것을 놓았는데 다른 무얼 원할까 그 무엇도 가지기가 싫은 나는 빈손, 잊자 잊자 혀를 깨물며 눈을 감고 돌아눕기를 밥 먹듯, 벌집처럼 조밀하던 기억의 격자는 끝내 허물어져 뜬구름, 이것이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지고 말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때문에 슬픔은 해구보다 더 깊어져 나는 내 빈손을 바라보다 지문처럼 휘도는 소용돌이 따라 망각의 우물로 더 깊이 잠수하며 중얼거려 잊자 잊자

(221, 성기완,『유리 이야기』(2003))


 

요즘 3호선 버터플라이엔 성기완 시인이 없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어 더 슬픈데. 문지시인선 500호. 독자들이 직접 뽑은 시 12편이 실린 필사노트 <그대가 있다>가 같이 왔다. 예쁘다. 12편 주인공은 누구인가. 기형도, 김소연, 심보선, 오규원, 이병률, 이성복, 이장욱, 최승자, 한강, 허수경, 허연, 황동규. 없는 진은영을 하나 더 발췌.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240-241, 진은영,『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내 책꽂이 문지시인선은 이렇다. 출간 순서대로 놓긴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 제일 위에 있기는 하다. 내처, 500호 기념시도 지어, 아니 조합해보고.


오늘은 잘 모르겠어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잘 모르는 사이
새벽에 생각하다
빈 배처럼 텅 비어
슬프다 할 뻔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내 생의 중력
가능세계
뜻밖의 바닐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사랑이라는 재촉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취한배, 「열여섯 개의 시집제목으로 된 시」) 500호 축하합니다. 등장순서대로 땡스투. 심보선, 임솔아, 박성준, 천양희, 최승자, 구광렬, 이제니, 황인숙, 서정학, 신영배, 400호, 백은선, 이혜미, 이장욱, 유종인, 500호.



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7/08/08 16:12 # 답글

    저랑 갖고 있는 시집이 거의 안 겹쳐요, 배님~ㅋㅋㅋㅋ 배님의 이 포스팅을 기반으로 제 안목을 좀 넓혀 보겠습니당 ㅋㅋㅋ
  • 취한배 2017/08/08 18:03 #

    사다리 님 소장 문지시인선도 보고 싶네요. 사진을 찍으면서도, 읭? 스러운 아이템 많았다는 점 참고요;; 그러니까, 몇 권을 빼고는 좋아해서 갖고 있다기보다 어쩌다 보니 남아 있는...?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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