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Smoking

박사가 사랑한 수식 - 8점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현대문학


영화로 봤던가? 예고편을 많이 봐서 본 걸로 착각하고 있는가? 하여튼, 내용은 알지만 숫자를 사랑하는 박사가 문득 다시 생각나서 구해 읽었다. 교통사고로 기억저장장치가 고장 난 전직 수학박사가 있고 그 집에 가사도우미로 파견되는 ‘나’가 주인공이다. 오노도 아니고 다와다도 아니고 오가와 요코 작가. 숫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문장이 과연 좋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경력의 저력이겠다. 예컨대 ‘나’의 생일날짜 220와 박사의 소중한 손목시계 번호 284 간 관계와 같은 쌍을 ‘나’ 나름으로 찾아보려다 하는 말이 이렇다.


한참을 계산해도 뭐가 보이지 않아 홀수로 범위를 넓히고 세 자리 수도 도입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모든 숫자가 어색하게 등을 마주 대고 있을 뿐, 잠시 옷깃만 스치는 정도의 인연도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박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 생일과 박사의 손목시계는 광활한 수의 세계에서 고생 고생 끝에 만나 서로를 꼭 껴안고 우애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32-33)


저 ‘계산’이 무엇인가 하면, 약수들의 합이다. 220의 약수 합은 284, 284의 약수 합은 220. ‘우애수’란다. 어릴 때 이름자 획수를 가지고 무슨 점을 치던 게 생각나기도 한다만, 음. (수학) 박사의 숫자놀이이니 주역이나 점 같은 얘긴 말자. ‘박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소수였다.’(88) 박사가 내게 생년월일을 물어봤다면 당장 나를 사랑하고 말았겠다. 나는 년, 월, 일이 모두 소수인 주민증 앞 번호를 가진 사람. 쿨럭. 숫자놀이 조금 더 해보자면 김쫑 생일은 1125. 내 생일은 1119. 1125-1119=6.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세 개가 모이면 악마의 숫자가 되는 6이기도 한데, 김쫑과의 나이차도 6년이네. 6년 밖에…… 아니네. 박정희 생전을 (무의식 상태라고 해도) 경험한 세대의 6년이니 뭐, 좋다. 1+2+3인 ‘삼각수’이기도 하고, 가장 작은 '완전수'이기도 하고, (점 아니다) 좋군.


<가족의 탄생> 같은, 혈연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이 아닌 '대안' 가족의 모습이 보기 좋다. 직업이 가사도우미이니 이 가족에서의 가사노동에 대한 보수가 확실히 지불된다는 점도 뜯어보면 나쁘지 않겠다. 내가 영화 <러브 송 포 바비 롱>에서 거부감을 느꼈던 게, 자기 혈연임을 알고는 급격하게 사랑, 관심 또는 애틋함을 느낀다는 설정이었는데, 사랑을 느낀 다음에 알고 보니 혈연이더라, 하는 막장드라마보다 어쩌면 더 뒤떨어졌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영 낯설었던 존재가 차차 익숙해지고 그이가 사랑하는 숫자를 나 역시 궁금하게 여기며 서로 걱정하고 존중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은 거, 그런 게 (가족 같은) 사랑 아니었나. 그 ‘매개체’로 어린 아들 루트도 존재감이 크다. 나중에 다 큰 청년이 되어 등장하긴 하지만 열 살짜리 야구광 어린이가 귀여웠다.


루트는 식탁에다 대학 노트를 펼쳐놓고 꼬물꼬물 뭔가를 하고 있다. 표지에 쓰여 있던 ‘정계수 삼차 형식 No.11’위에 두 줄이 그어져 있고 그 밑에 루트의 글씨로 ‘타이거스 수첩’이라고 쓰여 있다. 그 나름으로 타이거스의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박사에게 쓰지 않는 노트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3페이지까지는 해독이 불가능한 수식이 적혀 있고, 그다음부터는 나카다의 방어율과 신조의 타율이 적혀 있다. (207)


박사에게서 얻은 공책을 이어 쓰는 장면이 나는 왜 이렇게 좋은지. 혹시 나도 그런 적이 있어서였을까. 어린 눈에 완전 천재 같아 보였던 언니, 오빠의 공책을 물려받아 자잘한 줄에 넘치지 않게 글자를 써보려고 애썼던 옛날이 생각나서. 어쩌면 나도 참 귀여웠겠다. 음. 고등학생 때 내가 사랑했던 수학 선생님이 풀지 못한 문제를 오빠가 풀어줬을 때는 정말이지 오빠를 사랑했다. 내 의지로 가족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아마 박사가 얘기하는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였지 싶은데, 고요하지가 않다. 전직 대통령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해’야 성립될 고요함이겠다. 수학, 가족의 탄생, 박사가 사랑한 수식, 김쫑은 ‘박사모’라고 줄여 부르는 소설 리뷰는 이렇게 이상하게 끝.


수학 잡지의 현상 문제를 풀어 리포트 용지에 깔끔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고요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감이 아니라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해 덜거나 더할 여지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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