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Smoking

제국 - 10점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문학과지성사

 

바로 이런 시대와 함께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시대를 말하려는 사람은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모습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때는 20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인데, 20세기는 거의 절반 가까이 지날 때까지 완전히 독일인의 세기가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2)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제국주의의 식민 시대 남태평양 섬이 배경이다. 시기도 시기이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스리슬쩍 스치는 장면이 많아 얼핏 <1913년 세기의 여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옮긴이의 해설에 의하면, 크라흐트가 그린 인물과 사건이 역사적 사실과는 퍽 다르다고 하니 어쩌면 평행우주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겠다. 엇비슷한 시기와 장소를 골라 실재했던 예술가들을 줄줄 늘어놓는 농담은 끝이 없을 수도 있었겠는데, <제국>의 농담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유명인들을 얼마나 많이 알아보느냐에 재미가 달렸을 수도 있겠다. 히틀러, 아인슈타인,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을 알아본 정도로도 나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머지는 배수아 님의 도움을 받아도 좋겠다. 그마저도 “숨어 있는 흔적을 전부 다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312, 해설)는 평론가들의 평가라고.


자기만의 이상향을 좇아 실행에 옮기는 주인공이다. 영어식으로 보면 ‘천사 마음’ 쯤 되려나, 이름이 엥겔하르트인데, 이 사람도 실존인물에서 가져왔단다. 채식주의자, 코코야자주의자, 나체주의자, 반(反)자본주의자 독일인. 그이가 1919년에 사망하지 않은, 아마도 평행우주. 자기가 구매한 섬에서 유토피아를 이룬 것만 같은데, 혼자서라면…… 미친다. 슬슬 광기로 치닫는 과정이 말도 못하게 멋지다. 아니, 무섭다. 그러니까, 강렬하다. <암흑의 핵심>  커츠 대령의 그것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렇게 크라흐트는, 아니 엥겔하르트는 몰락을 예술로 만든 건가 보다.


엥겔하르트는 예술가란 존재와 그들의 능력에 대해 깊은 존경의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자신은 그들처럼 어떤 예술적 업적을 이룰 만한 자질을 타고나지도, 또 그럴 만한 훈련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감정은 거의 질투에 가까웠다. 시선을 수평선으로 향하고 두 눈을 감으면서, 그는 자신의 카바콘 거주 자체가 혹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불현듯 자기 자신이야말로 스스로 만들어낸 예술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드는 것이다. (190)


소설의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구조는 자칫 구태의연할 법도 한데, 아니었다. ‘거대한 순환 고리, 뫼비우스의 띠, 불의 바퀴, 그리고 칼라차크라’(268), 꼬리를 입에 문 뱀, 자신의 일부를 삼키는 행위와도 구조가 맞아떨어져 지능적이고 논리정연해 보일 지경이다. <파저란트>의 결론 때문인지, 참으로 미안하게도 나는 크라흐트가 요절한 작가인 줄만 알았는데 이 소설은 2012년 작품이고 지금도 건재하신 듯하다. 헌사 ‘호프Hope를 위하여’의 호프가 딸 이름이라니 더욱 미안해진다. 소설 속, 그러니까 허구의 이야기 속에 실재 인물과 역사를 끼워 넣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역사, 시간의 흐름이란 것에 연상이 다다랐는데, 고맙게 이런 문장도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정확하게 시작되고 확실히 규정된 경로를 거친다는 유력한 세계관은, 슬뤼터의 사고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 음흉하고 불가해한 ‘지금’은 인생의 모든 구석 모든 끄트머리에서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발산하며, 엑토 플라즈마 형태로 너울거리며 피어나 통제 불가능한 가스처럼 존재의 온 방향으로 흘러나가며, 매 순간 순간이 갖는 결정적이고도 유일무이한 성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244-245)


또 다른 인물 슬뤼터가 인생의 선택 지점에 와 있는 대목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순간의 안타까움을 전혀 살피지 않는 것이다.’로 이어지는데, 현재를 지금 당장 파악하기는 무척이나 힘들 것이라는 얘기이겠다. 역사는 현재들이 지나가 차곡차곡 쌓여 이뤄지는 것임을, 오늘 jtbc 뉴스를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도행역시(倒行逆施2013)-지록위마(指鹿爲馬2014)-혼용무도(昏庸無道2015)-군주민수(君舟民水2016) 교수신문 선정 사자성어들. ‘정리하면 순리를 거스르고, 옳고 그름 마저 뒤바꾸더니 어리석은 군주의 실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결국 성난 백성들이 배를 뒤집는다.’(손석희) 우리가 지나온 박근혜 정부 모습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몇 년 지나 결과적으로 매끈한 한 문장을 주는 게 역사인가 보다. 종잡을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들 앞에 우리 모두 지금 여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아 참, <제국> 재밌다.



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7/01/02 16:49 # 답글

    이 책도 아름다운가봐요... 전 오늘 출근길에 겨우 40여 페이지만 읽고 말았어요ㅋㅋㅋ
  • 취한배 2017/01/02 22:37 #

    오. 이 책 읽으시는 거예요? 아름답다기보다는, 음, 멋있어요. 살짝 무서우실 텐데... 아몰라용.ㅎㅎㅎ
  • 달을향한사다리 2017/01/03 18:17 #

    아뇨,이 책은 아니구...^^;; 올해부터 책을 좀 줄이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작년만 같았어도 출근길에 100 페이지는 읽었을텐데, 어제 오늘은 그냥 조금 읽다가 말고 그래요ㅋㅋ 근데 이렇게 조금 읽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댓글도 이렇게 달았네요ㅎㅎㅎ
  • 취한배 2017/01/04 00:07 #

    아~ㅋㅋ 출근길에 작년엔 100페이지씩 읽으셨다니 으앗@@; 눈 피로를 느끼신다는 게 이해도 되네요. 이러구러 책을 줄이신다면서 막상 조금 읽으면 불안해하시고.ㅜㅜ 제 진단은... 심각한 책중독이십니다, 사다리 님.ㅎㅎㅎ (한 65페이지로 협상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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