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Smoking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10점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창비


아름답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내 친구 노리스 씨. 이데올로기 급변 시대 베를린 속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내 친구. 우스꽝스럽다가 비장하다가 영웅이 아니고 지극히 세속적인 인물로 밝혀져도 결국은 내 친구, 우정 혹은 사랑과 그리움. 노리스 씨와 화자가 결정적으로 친구가 되는 장면을 나는 이것으로 봤는데.


여느 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나는 그의 가발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매우 무례하게 빤히 쳐다봤던 것 같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내 시선이 가는 방향을 봤으니까. 그가 단순히 이렇게 물어 와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비뚤어졌나요?”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엄청나게 쑥스러웠다.
“아주 조금요.”
그리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둘 다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우리는 마침내 그 물건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마음이 후련해서 마치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난 두 사람 같았다. (50)


함께하는 웃음의 순간. 마침내 언급한 ‘그 물건’, 자신의 약점이나 열등감이 더 이상 숨겨야 할 무엇이 아닌 것이 되었을 때 친구가 되는 거 아닌가 싶다.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고 손톱을 다듬고, 우아한 옷차림에 섬세하게 신경 쓰는 노리스 씨를 존중하고 거들어 주는 화자이고, 노리스 씨의 진상을 알게 됐을 때도 교묘하게 수를 써 외면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거기 있어 주는 화자이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도 네 편이야.’(<고양이를 부탁해>)와 어느 정도는 같은 맥락 아닐까 싶다.


내 경우, 마트에서 어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도주를 한 병 ‘뽀리게’ 된 적이 있었다. (직원이 계산 끝난 내 물품들 쪽에 한 병을 갖다놨더라, 장바구니에 그냥 넣어왔지.) 그 포도주를 같이 마시며 얘기를 전했을 때.
1. 와, 진짜 잘했다. 떨렸겠어.ㅋㅋㅋ 더 맛있네, 건배.
2. 음, 그건 절도잖아. (뚱.)
나는 1번 반응이 친구 것이었으면 했다. 내가 절도니, 도덕을 몰라서 네게 양심 고백을 하는 게 아니니까. 이 글을 보고 나의 ‘도덕성’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내가 동성애자 작가를 좋아하는 모든 이유가 이 책에 있다. ‘나는’이라는 간결하고 직접적인 주어 대신에 ‘남자는’ 또는 ‘여자는’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이상하고 비겁한 (거기에 당연하다는 듯 올라타는 식이든, 해당 성별을 폄하하면서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식이든) 어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렇다. 화자의 친구 헬렌의 성격 묘사에서 언급되는 바, ‘헬렌은 자신이 여자임을 누군가가 상기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 침대에서를 제외하고 말이다.’(71)


사랑과 우정도 내게는 그렇다. 나는 친구를 사랑하고 애인을 ‘우정’하기도 한다. ‘소녀소녀’하거나 ‘마초마초’한 글보다 훨씬 더 큰 자유와 우정의 느낌. 거칠게 나누는 두 개의 성별에 갇히면 그만큼 세계도 좁아지는 거다. 섬세하고 다양한 스펙트럼, 묘한 인간관계. 큰 한 방이나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지 않는데도, 소소한 관찰과 소란에 지나지 않는데도, 이셔우드, 너무나 아름답다. <싱글맨>에 그쳤으면 진정 이셔우드 겉핥기였을 듯하다. 훌륭하지 않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노리스 씨, 화자의 친구였다는 점만으로도 나는, 당신이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도 당신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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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6/11/01 01:46 # 삭제 답글

    노리스씨 든든하겠네요. 도끼로 사람을 찍어죽여도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친구도 있구요 ㅋㅋ 같이 먹튀해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합니.... 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뽀리기' 하하 너무 귀엽네요. 이런 단어사용이라니 ㅋㅋ 반전매력 ^^
  • 취한배 2016/11/01 22:36 #

    노리스 씨는 정말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인데 화자가 그이를 친구 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할까요, 취해서 횡설수설한 리뷰에.ㅜㅜ '같이 먹튀'ㅋㅋㅋㅋ덧글 고마워요. 뽀리기? '뽀'자 때문에 귀여운 거 아닐까염, 뽀 님?ㅎㅎ
  • 다락방 2016/11/01 10:25 # 삭제 답글

    저도 1번.
    그리고 이 책은 보관함으로 슝-

    뽀린게 와인이어서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막 이러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취한배 2016/11/01 22:38 #

    직원이 실수로 갖다놓은 게 (비슷한 무게가...) 샴푸나 주스였다면 어, 이건 제가 산 거 아닌데요? 했을 거예욤. 당연히!!ㅋㅋㅋㅋ 뽀린 와인 좋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친구님. 히히히히~
  • 2016/11/01 10: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11/01 22:3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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