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Smoking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비채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단편들을 조사하고 있다. 아무런 형태도 의미도 없는 머나먼 삶의 조각들. 그것들은 막 생겨난 보풀 같다. (158,「보풀」)


보풀 같은 브라우티건의 캘리포니아를 서울에서 추석에 읽는다. 가본 적 없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캘리포니아 기후를 연상하며 읽는 브라우티건은 추석, 즉 가을의 시작과 묘하게 어울린다. 장편(掌篇)이라할 만한 단편(斷片)들이, 짧고 아련한 유년 같다. 그래, 정말 ‘보풀’ 같다. 보풀들 중에서 나는 유난히 브라우티건이 자주 등장시키는 문에 눈이 갔다.


노파는 문을 열었다. 문은 믿음직한 친구였다. 노파는 문에 목례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서 긴 복도를 걸어 벌이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58,「샌프란시스코의 날씨」)


“네 소설에서 내가 뭘 하는데?” 기대에 차서 내가 물었다.
“넌 문을 열어.” 그가 대답했다.
“그것 말고 뭘 하는데?”
“그것뿐이야.”
“오.” 내가 말했다. 갑자기 내 명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른 일을 하면 안 돼? 문을 두 개 연다든지? 누군가에게 키스한다든지?”
“문은 하나면 충분해” 그가 말했다. “그걸로 충분해.”
“문을 열 때 대사는 있어?”
“없어.” (173,「캘리포니아에서의 명성, 1964년」)


아닌 게 아니라 “넌 문을 열어.”같은 평범한 문장이 지독히 아름답게 들릴 수 있음에 놀라는데. 곰곰. 그런 게 분위기이자 장치이고 취향이려니.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마음에 남는다. 비집고 들어오고 틈을 낸다. 문학이라는 건가 보다. 이준규 시인의 「문」을 떠올리고 만다. 문이 moon은 아닐 텐데, 달은 동그랗고. 해피 추석.


문을 연다. 흐른다. 흰색에 더해지는 흰색. 문을 열고 들어가 문 앞에 서다. 지나가다. 멈추다. 지나가다. 서다. 문을 연다. 흐른다. 문을 연다. 문을 열었다. 서 있는 너. 그것. 돌아서는 몸. 돌아서는 몸. 흐르는 너. 흐르는 너는 주름이 깊다. 문을 밀고 들어가. 서다. 앉다. 그가 말한다. 흐른다. 그가 말한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흘러. 그가 말한다. 사다새 하나. 사보텐 하나. 사보타주 하나. 매미에서 귀뚜라미까지. 그가 말했다. 실솔. 그가 말한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나. 그대는 어디에. 나는 그대를 사랑하나. 금작화. 엉겅퀴. 수국. 개밀. 쐐기풀. 그가 말했다. 당신. 노래하는 당신. 당신은 어디에. 아무르 강 넘어 문지방 넘어 흐릿하게 선 그. 그를 보고 그가 말한다. 그가 말한다. -「문」(이준규,『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문학과지성사 2010)







덧글

  • 2016/09/16 00:45 # 삭제 답글

    오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저같은 밍밍한 사람은 문을 연다에서 감동받지 않았을 거 같은데 리뷰를 통해 다시 태어난 '넌 문을 열어' 멋진 문장이네요.
    생일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냈어요! 불새 출판사 생각도 하면서 말이죠. 하하 어찌 보답을 해야할까.. 싶다가도 난 절대 배님에게 책 선물은 못해!! 뭐 이런 결론으로 마무리 ㅋㅋㅋㅋ
  • 취한배 2016/09/19 00:30 #

    게으른 리뷰입니다; 문이 뭐라고 말이죠. 근데 주목하게 되고 말이죠. 밍밍한 사람ㅋㅋ포 님 문 좀 열어 주세염.ㅎㅎ
    생일 즐겁게 보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멀리 계시니 생일이 더 잘 기억되네요? 책 선물은 희한해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책 선물은 못해!, 이런 말조차 참 좋고 말이죠.ㅎㅎ 한 살 맛있게 드셨으니 더 멋진 모습이시기를요. :)
  • 다다 2016/09/16 21:37 # 답글

    이준규 시인의 시는 제겐 정말 어렵군요. 이미지 흐름이 슬쩍 잡히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자취를 감추네요. 어렵습니다. 한배님 ㅠㅠ
  • 취한배 2016/09/19 00:30 #

    시가 어려운 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다다 님.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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