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NoSmoking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10점
이제니 지음/문학과지성사
 

감이 먼 목소리로 너는 말한다. 이것이 내 사과다. 사과는 어둡구나. 사과는 부드럽구나. 부드러움과 미래는 가깝구나. 사과를 받은 내 마음은 고요하다. 사물들은 끝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사과 이전에도 사과 이후에도. 한없이. 가없이. 동시에. 일시에. 간헐적으로. 산발적으로. 한 마음에서 한 마음으로 건너갈 때. 한 마을에서 한 마을로 건너가듯이. 영영 뒤돌아섰지만 다시 뒤돌아서게 될 겁니다. 어쩌면 다시 제대로 만나게 될 겁니다. 사과는 감이 멀었지만 우리는 감으로 다 알아들었다. 가장 순한 순간에도 가장 악한 악한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누구도 너를 비난할 수 없다 오직 너 자신 외에는. 맺힌 것이 있었던 것처럼 너는 울었다. 매끄러운 곡선 위를 흐르는 하나의 물방울처럼. 울면 풀리는구나. 풀리면 가까워지는구나. 탁자 위에는 작고 둥근 것이 놓여 있었다. 흐릿하고 환하고 맑고 희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이제 막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사과 이후에 문득 가까워진 감이 있었다. (44,「사과와 감」전문)


시가 필요했고 시를 얻었다. ‘한 편의 시를 쓰고 있었다 / 이런 낱말을 가지고 있었다’(112)  이제니 식 낱말나열에 중독될 지경이다. 멋지다, 멋지다. 본문만큼의 양은 족히 될, 긴 해설은 읽지 않는다. 이제니의 리듬감으로 5층을 내려가(약간 절뚝절뚝해야 한다) 이제니의 낱말을 사왔다. 복숭아. 털 보슬보슬 다정함은 아니고 매끈매끈 천도복숭아였다. 간지러울까봐. 간지러워 긁다가 욕할까봐. 장바구니에서는 김밥, 칫솔, 파란티셔츠, 맥주, 소주라는 낱말들도 쏟아져 나왔다. 김밥은 먹었고 5천 원짜리 파란 티셔츠는 몸에 잘 맞고 이따 취해 자기 전 ‘피가 나도록 피가 나도록’(최승자) 이 닦을 거고 건배라는 낱말은 건네려고 여기에 가지고 왔다. 시답잖은 내 말은 이만, 시나 옮긴다. 긴데, 감히 자르지를 못하고.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창에 빠지는 기분으로.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로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 (162-163,「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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