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가능성의 거리 NoSmoking

모든 가능성의 거리 
박정대 지음/문예중앙

 

그대의 목덜미를 바라보는 일, 그대의 윤곽을 바라보며 그대의 본질을 상상하는 일, 나의 유일한 관심은 한 영혼이 또 다른 영혼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69,「아자니 거리의 모든 가능성」부분)


‘그대의 목덜미를 바라’보고 오던 귀갓길에 다시 펼쳐 든 <모든 가능성의 거리>. 술, 담배, 여행, 노래, 사랑, 혁명, ‘감정 공산주의’(19). 표지의 날개 달린 기타처럼 정처 없는 방랑, 음유 시인가 싶은데, 동시대 특정 유명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하고. 성기완 시인 해설에 의하면 평행우주를 그리는 시. 세상에! 성기완으로부터 ‘형’이라는 호칭이 포함된 해설을 받는 건 어떤 느낌일까. ‘형. 별 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형은 대체로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 보여요.’(240, 해설, 성기완) 성기완 시집 <당신의 텍스트>에서는 이광호 작가의 해설이 반갑더니 박정대 시집에서는 성기완의 친밀함이 부럽다.


육체의 방식, 감정의 방식은 ‘우연’에 절대적으로 기댄다. 박정대는 말라르메의 제자. ‘단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로 모든 우연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는 말라르메의 철칙을 박정대는 우대한다. 우연은 육체의 다른 이름. 우연은 변덕의 다른 이름, 우연은 집시의 좌우명, 우연은 평행 우주를 낳은 우주의 법칙. 이 시집을 읽는 묘미는 감정의 평행 우주가 우연히 그려내는 생생한 동선을 구경하는 데 있다. (224, 해설, 성기완)


박정대 시인의 ‘낭만’이라면 또 이런 식일 텐데, 제목 없이 먼저 읽는다. 어젯밤 베트남 하노이로부터 도착한 문자메시지의 발신자에게 내가 바치는 부분은 볼드체. 토닥토닥 적당한 답문을 구성하지 못한 내 부족함이 걸신처럼 가 찾은 단어, 다락방. 하노이에서 맞는 ‘그대 맑은 숨결 같은 바람’이, 혹은 레스토랑에서 흐르는 음악이, 마음속 빈 부분에 들이쳐 얼마나 아팠을지. 다시 한번, 토닥토닥.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건배.


희미하게 그대의 얼굴이 보일 정도면 된다
천창을 통해 별빛들이 쏟아지면 된다
선반에 쌓여 있는 약간의 먼지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자
술을 마시는 날들을 위해
뜨거운 국물을 끓여낼 수 있으면 된다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금방 공기가 맑아지는
히말라야 근처면 된다
다락방 위에는 청색 하늘
다락방 아래엔 끝없는 대지
다락방 곁으론 날마다
그대 맑은 숨결 같은 바람이 불면 된다
사랑하는 그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면 된다
당나귀, 굳이 차마고도를 지나오지 않았더라도 된다
일주일에 한 번 당나귀에 실은 물품이 당도하면 된다
당나귀, 폭설에 길이 끊겨
설령 한 달을 오지 못한다 해도
고독과 함께 그대만 있으면 된다
삐걱거리는 계단이 있고
계단 위엔 다락방 카페가 있고
다락방 카페엔 의자와 탁자가 있으면 된다
한 달 내내 눈이 내려
세상의 길이란 길들 모조리 막힌다 해도
뭐든지 함께 하고 싶어지는 그대만 있으면 된다
약간의 식량과 술과 담배만 있으면 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으면 된다

두툼한 스웨터만 입을 수 있으면 된다
조명은 희미해도 된다
별빛이 쏟아지면 된다
히말라야 근처면 된다

(212-213,「체 게바라 만세」전문)






덧글

  • 휴무중인댓글로봇 2016/06/06 22:15 # 삭제 답글

    현충일은 (내 마음대로) 쉽니다.
  • 취한배 2016/06/07 00:33 #

    공지가 늦었던가요? "현충일은 쉽니다. 다음날 출근하세요."
  • 측근 2016/06/07 08:46 # 삭제 답글

    아니, 박정대잖아! 하며 들어와 읽었더니 이런 글이로군요!
  • 취한배 2016/06/07 16:33 #

    측근님이잖아! 하며 들어왔더니 이런 댓글이로군요! (카피시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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