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철리가의 여인 Smoking

위철리가의 여인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시작

 

“그런 거 없어요. 내가 아는 건 피비가 긴 여행을 떠나려 했다는 것뿐이에요.”
부인 자신의 기나긴 몰락의 여행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슬픔이 철사처럼 그녀의 양쪽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158)


위철리가의 여인 행방, 궁금하진 않았는데. 궁금해지기 위해 읽다보니 정말로 궁금해져 버린 경우. 로스 맥도널드이니 아, 이러이러하겠구나,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정말 이러이러해 버려서 흥미가 뚝 떨어지진 않았고. ‘슬픔이 철사처럼 그녀의 양쪽 입꼬리를 잡아당겼다’는 저런 멋진 표현들이 루 아처를, 아니 로스 맥도널드를 ‘유니크’하게 하는 거였지, 했다. 다른 말로, 루 아처가 명석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힘은 주요 인물과 주변 인물들의 심리에 깊이 공감하는 능력에서 온다는 느낌.

‘추리도 못하는 주제에’라는 대사는 김쫑이 말장난으로 내게 던진 말인데 ‘추리도 못하는 주제에’는 ‘공감도 못하는 주제에’로 바꿔 써도 될 화두이지 싶다. 특히 배신당하고 슬퍼하고 불행하고 불안정한 여인들의 행동이나 상태를 이런 문장으로 풀어 써 놓는 탐정이라면 기꺼이, 고용하고 싶어지는. 그러니까, 사랑스럽다거나 멋지다, 보다는 ‘고용하고 싶다.’


메리먼 부인이 내려놓은 술병에는 술이 8분의 3만 남았다. 책상 위에 몸을 수그린 그녀는 옆에 놓인 회전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마치 모세관 현상이 일어나 마음속에서 어둠이 새어 나온 듯 머리카락 뿌리가 까맸다. (110)

그녀의 눈길이 내 얼굴에서 어깨로 스르륵 내려갔다. 마치 기대고 울 자리를 찾는 사람 같았다. (142)


미국 60년대 배경, 없어진 누군가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가정사의 어두운 비밀을 밝혀내는 루 아처까지, <소름>의 로스 맥도널드가 고스란하다. 새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어쩌려고 자꾸 규모를 키우시나, 했더니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인물도 사건도 실마리도 꽉 짜인 얼개 안에서 경제적이고, 결말 또한 깔끔하다.

3일 간 진행되는 탐방과 조사. 이렇게 성실한 탐정이 어디 있을까 싶은 루 아처가 호텔에서 3시간 꿀잠을 이루는 장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전철에서 <위철리가의 여인>을 잠시 덮고 깜빡 수면을 취했던 어제 낮이 생각나서인가 보다. 전날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배 든든히 채운 점심식사 후였으며 낮술이 끊겨 시무룩 상태로 햇볕 속에서 꽤 걸었던 기억. 광합성이 보약. 식물에게도, 수면장애 영혼에게도. 위철리가 여인의 행방에 대해서는 함구할 텐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끝내면 이상하니까, 연륜의 우리 루 아처 한 컷 더.


그는 고집스러운 의심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때로는 가장 뛰어난 젊은이도 더러 그러듯이, 보비는 어른들의 세상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어서, 보비. 우린 지금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시간이 뭐 그리 중요하죠? 수면제를 먹고 10년 뒤에 깨어나면 좋겠어요.”
“난 1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약을 먹으면 좋겠어. 하지만 어쩌면 그러지 못하는 게 오히려 나을지 몰라. 그토록 예습을 했어도 결국 같은 실수들을 되풀이할 테니까.” (345)


시작 출판사 메듀사컬렉션 이원경 번역 <위철리가의 여인>(2009)에 앞서 동서문화사 김수연 번역판 <위철리 여자>(2003)가 있었다. 두 번역을 비교해보진 않았지만 옮긴이(이원경) 말에 의하면, ‘기존에 번역본으로 나와 있는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들은 그 명성을 고스란히 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418)란다. 새 번역이 나와 주는 건 독자로서 늘 기쁜 일.


위철리 여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수연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덧글

  • 고용된댓글알바 2016/05/18 16:47 # 삭제 답글

    친구 왈, “너 우리 미용실 와서 소설 써라.”
    나 왈, “내 집 놔두고 뭐 하러 미용실까지 가서 소설을 쓰냐?”
    친구 왈, “그럼 소설 쓸지 말고, 머리카락이나 쓸어라.”

    혀는 이미 꼬부라져 계셨다. 발음도 못 하는 주제에.
  • 취한배 2016/05/18 17:16 #

    나 왈, “너 작업실 와서 내 머리나 깎아줘라.”
    친구 왈, “내 미용실 놔두고 뭐 하러 네 작업실까지 가서 머리를 깎냐?”
    나 왈, “그럼 머리카락 깎지 말고 연필이나 깎아라.”

    알바 바꿔야겠다. 주어가 없는 문장, ‘시적 허영’ 부리는 주제에. 킁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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