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문학동네 |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66)
는 파울 첼란의 문장을 실현하고 있는 책. 독일어 시인들이 머물렀던 장소를 돌아보며 시인과 시를 얘기하는 기행문. 시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꾹꾹 눌러 담은 마음, 조근조근 들려준다. 띄엄띄엄 읽었다. 쓰인 것 또한 그러해서 읽는 이 마음 가는 대로 시인을 골라 읽기에 부담이 없다. 첼란, 바하만, 릴케, 벤, 횔덜린, 괴테를 골라 읽었고 특히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고트프리트 벤은 더 좋아졌다.
시의 한 단어에 실릴 수 있는 실존적 무게, 한 단어가 뿜는 섬광이 발할 수 있는 우주적 광채가 짧은 시에 명사의 나열만으로, 마치 화면 몇 장으로 연속성을 이루어내는 동영상처럼 담겨 있다. (355)
그렇단다. 번역문으로는 와 닿기가 힘들 지점, 원서로 향유하는 시심(詩心)이 부럽다. 독일 가까운 유럽 도시 여기저기를 기차로, 자동차로. 추체험을 위해 나는 지도라도 펴 놓고 읽었을까. 그럴 리가. 그렇더라도, 마음이 담뿍 담긴 사진들이 적지 않게 배치되어 ‘문학기행’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거장인 만큼 괴테에 큰 비중을 둔 마지막 챕터다. <이탈리아 기행>의 표지로 곧잘 실리는 티슈바인의 ‘캄파니아의 괴테’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 보관함 속 이 책 표지 그림도 같은 화가의 괴테 뒷모습이란다. 젊고 아름다운 뒤태 괴테라니.

괴테가 로마에서 머물렀던 집 주인이 화가 티슈바인이었고, 바로 저 방의 높고 작은 창문 말인데.
시인과 창문-아니 시인이 아니어도, 누구든 창문 앞에 설 때는, 세상과 자신을 짚어보게 마련이다.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가 싹트고, 삶에의 또 먼 곳에의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이다. 세상과 만나는 선들이 펼쳐지는 초점 같은 곳이 아닐까.
나도 오래 그 창가에 서 있다. 창가에 한참 서 있다 보니, 왠지 여기까지 나를 오게 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다 하고 난 느낌이 든다. 다른 것들은 어쩐지 나머지 같다. (466)
‘시인이 그렇게 자주 고즈넉이 내려다보고 있었을, 그림에 그려지지 않은 창밖의 모습-그 보이지 않는 거리가 오래도록 기이하게도 마음을 끌었다.’(454)고 하는 심정. 피곤한 여정 끝에 비로소 같은 배경 속에 내가 들어 있게 되는 감동. ‘다른 것들은 어쩐지 나머지 같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다. 시인들이 남긴 글에 이끌려 그 자리에 서 보는 것. 시간은 흘렀을지라도 공간은. 공간은 그래도 좀 느릴 것이다. 특히 유럽이라 가능했을 ‘닿음’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으로 보존, 이후 재건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뚝딱뚝딱 새 건물과 새 길을 짓기에는 꽤나 신중한 곳. ‘닿는다’는 말이 공간적임에야. 시간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게 예술이라고 했던가. 흘러버린 시간의 공간에서 북받쳐오는 것은 감격이리라.
<시인의 집>이고 에필로그까지 시인의 집이다. 먼 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나만의 시(詩)공간, 여주에 위치한 저자의 소박한 다락이 그것이다. 저자 ‘시인의 집’을 보았으니 이제 저자 ‘시집’을 보게 될 날도 올까. 산마을 폐옥이 될 뻔했다는 그런 장소에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이물질’ 팩스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다. 저자가 존경해마지 않는 시인으로부터 ‘우체통 인 양 가끔씩 글이 나온다’(493)는 기계. 팩스를 가져본 적 없는 나는 스르륵스르륵 나만을 위한 시(詩)가 가끔씩 찍혀 나오는 그런 시(時)를 상상해 보게 된다. 예컨대 모두 잠든 비오는 새벽 같은 때, 너로부터.
내가 혼자 우그리고 앉아 쓴 시를 팩스에 넣으면, 지구 반 바퀴 너머에서 어김없이 곧바로 답이 온다. (493,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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