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시계 Smoking

종이시계 - 8점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문예출판사
 

앤 타일러는 아마 조박사가 추천했지 싶은데, 하루 소설. 결혼 30년차 부부와 가족 이야기. 인간들이 ‘인내하고, 서로 방해하고, 적응하고, 포기하고, 그리고 아침에 다시 시작하는’(474) 이야기. 귀엽기도 하다가 따뜻하기도 하다가 숨 막힐 듯 답답하기도 하다가 마침내 아, 그래서 내가 가족을 떠났지, 내 가족 따위 만들지는 말아야지 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고 ‘인내하고, 서로 방해하고, 적응하고, 포기하고, 그리고 아침에 다시 시작하는’ 인간관계가 없으리라는 건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특수 관계가 나는 참 싫은데 이승우에게서 본 어떤 인물은 ‘끔찍한 것들’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지, 그러면서 이런 문장도 생각났고.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무례했고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가족이 특별히 무례하고 악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가족은 가족에게 무례하고 모든 가족은 가족을 무시하고 모든 가족은 가족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한다. 모든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무례하고 가족을 무시하고 가족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면서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거나 자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승우,『신중한 사람』133,「이미, 어디」)


앤 타일러의 매기-아이러 부부가 서로에게 무례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지는 않는다만. ‘약간만 조절해준다면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449)하는 매기와, 무심한 듯 또는 무관심한 듯하지만 사실을 자체로 파악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곤 하는 아이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인내하고, 서로 방해하고, 적응하고, 포기하고, 그리고 아침에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환’(474)이 인생 30년을 포함하고 있는 하루 소설에  멋지게 담겼다. 개입하여 바로 잡아야할 필요를 느끼는 매기에 비해 그런 시간적, 감정적 낭비에 대해 경계하는 실용주의자 아이러가 사실은,


진짜 낭비는 이 사람들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 나약하고 좌절해버린 아버지마저, 자신의 가엾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마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255-256)


사랑이란다. 내 꿈을 접고 가족을 부양하는 거. 휘두르고 개입하여 바로 잡으려는 것도, 낭비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사랑이겠지. 술 취해 전화하는 내 아빠도, 내가 술 취해 전화하는 엄마도, 사랑일까. 가족은 맞는데 가족이 아니어도 될 것 같고. 사랑하고 보니 내 가족이네, 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고. 가족이기에 강요되는 사랑은 싫고.

가족, 어렵고 싫고 아직도 모르겠고.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모든 미묘한 책임과 권리와 의무와 허울에 나는 재능이 없는 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최근에, 햇볕 속을 걷다가 불현듯 내 엄마 아빠가 볼품없이 늙어가며 더욱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떠올리며, 부모의 이런 변화를 결코 알 수 없을 너에게, 무례할지도, 건방진 말일는지도 모르겠으나 감히, 사실은 그런 점이 무척 부럽기도 하다고 전화할 뻔했다는 말을 끝으로.


“제기랄, 우리는 그때 막 배우는 중이었지. 서로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랐어.”
그가 말했다.
“이제는 알죠.”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그의 따스한 목덜미에 키스했다. (174)


구판본으로 읽었고, 개정판은 이런 표지.


종이시계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문예출판사




덧글

  • 다락방 2016/04/21 09:23 # 삭제 답글

    저도 구판으로 가지고 있어요. 아직 읽기 전인데, 어쩐지 개정판을 사고 싶더라고요. 물론 사지는 않았습니다. '낭비'하지 않으려고요.

    '낭비'는 앤 타일러의 화두일까요.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에도 낭비에 대한 언급이 나와요. 인용해보겠습니다.


    "넌 정말이지 낭비가 심해, 아론." 페기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은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반가워할 거야. 너는 그 여자의 속셈을 알아보느라 분주하지."
    내가 말했다. "어떤 여자의 속셈을 말하는 거야?"
    "넌 그것조차 보지 못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누가 낭비되게 내버려 둔다는 거냐고? 지금 루이스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 p.264-265)
  • 취한배 2016/04/22 23:24 #

    정확히 같은 '낭비'가 나오네요? 누군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는 거, 나쁜 짓이죠. 정말 나빠요. '낭비' 부분을 딱 찾아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도 좋을 것 같네요. 고스란히 앤 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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