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Smoking

해변에서 - 8점
네빌 슈트 지음, 정탄 옮김/황금가지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에 참 좋은 날씨입니다. 비라도 내렸다면 정말이지 죽을 맛이지 않겠습니까?” (263)


휴가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고 결과적으로, 이승에 짧게 휴가 나온 인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북반구 강대국들의 바보짓-핵폭탄 투하는 자멸을 초래했고 방사능이 남반구로 이동 중이다.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에서 가장 남쪽인 해변이 제목의 해변이다. 그레고리 팩과 에바 가드너가 열연한 「그날이 오면」은 못 보았는데,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란다.

『인간 종말 리포트』(마거릿 애트우드)를 나는 걸핏하면 ‘인간 말종 리포트’라고 말하곤 하는데 종말 문학에서 심심찮게 인간 ‘말종(말짜)’의 모습을 보기도 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얼마 전에 출간된 『사이버 스톰』에서도 멀쩡했던 사람이 재해에 처하면서 이기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상황을 본 적 있다. 그러나 『해변에서』는 달랐다.


“이걸로 사겠어요.”
“알았습니다. 소형치고 좋은 거죠.” 그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평생 쓰겠네요.”
“여기 47파운드 10실링. 수표로 계산할 수 있습니까?”
“오렌지 껍질로 계산해도 되죠. 오늘 상점 문을 닫거든요.” (346)


이 세상의 끝을 아는 사람들, 어찌할 도리 없이 종말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내 죽음 앞에, 당신의 죽음 앞에, 관대해질 수도 있는 거다. 말(末)종이긴 할 터인데, 늘 하고 싶던 일을 비로소 해보며, 남을 위해 힘써 보기도 하고, 나보다는 당신을 기쁘게 해 보려는 모습들이다. 강세가 앞에 있는 ‘인간 말종.’ 『사이버 스톰』과는 다른 상황이기도 하나, 그 또한 제 각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개인들의 덕분이다.

성인이 된 이후 줄곧 몰아온 전차를 마지막 날까지 운행하는 기관사, 마지막 날까지 수선화 구근을 심고 정원을 가꾸는 부부, 소를 돌보고 밭을 일구며 농장에 비료를 주는 노인, 취미로 자동차 경주를 동경하다가 결국 경기에 출전하는 과학자, 누군가들은 ‘모두가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고’(236) 할 그런. 그런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딜까.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 말고는.

자신의 죽음보다는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아기나 개, 소의 건초와 먹이와 외로움을 걱정하는 인간적임, 아름다운. 쓰일 데 없을 속기와 타자를 배우고 기약 없는 사랑과 봉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함장은 끝까지 규칙을 준수하고 잠수함과 함께한다. 다른 대륙의 방사능 수치를 점검하는 임무에서 한 수병은 피폭 위험 시간을 간신히 넘기지 않는 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몇 분간에 무엇을 했을까.


그는 발길을 되돌려 송신실 계단을 올랐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분, 그래서 곧장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뭉치가 놓여 있는 창틀로 갔다. 그가 예상한대로, 전쟁 직전 스콜피언이 진주만을 출발한 이후 발행된 것이 세 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보지 못했고, 잠수함의 승조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잡지를 훑어보았다. 「숙녀와 벌목꾼」이라는 연재물의 마지막 3회분이 실려 있었다. 그는 앉아서 읽었다. (259)


슈니츨러의 단편 「내가 만났던 한 중국인」에서 보았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독서에 할애하는 장면과도 만나고, 임박한 마지막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저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좋았다. 네빌 슈트는 최근에 본 『록스 호텔』에서도 언급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루크(스카이워커 아니다)가 사고로 바다에 빠져, 오지 않을 구조를 기다리며 물에 떠 있는 동안, 전작품을 다 읽지 못해 아쉽다며 떠올리는 작가. 우리에겐 번역본이 이『해변에서』밖에 없다는 게 비극이지 싶다.


“정원벤치를 아직 마련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저기, 울타리 옆에 놓으면 정말 근사할 텐데.” (383)


언제 죽는 들, ‘난 다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아쉬울 거다. 죽어도 아쉬울 그런 거, 한번,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하지 않을까. 클리셰 같지만, 마치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인 듯, 미안했던 거 고마웠던 거 특히 너를 사랑했다는 고백 같은 거 미루지 말고 얘기해야 할 것만 같았다. 종말 소설의 힘이고, 말짜 아닌 세계시민으로서의 인간성을 일깨워주는 문학. 엉뚱하겠지만 방사능이 퍼져 이 세상이 끝날 때, 어쩌면 당신과 나, 술꾼들이 인류 종말의 마지막 목격자가 될지도 모르... 쿨럭.


“술을 마시면 방사능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하는 것 같아. 몰랐어?”
“그러니까 술에 절어 지내면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거야?”
“며칠 정도. 더글러스 종조부님의 경우에는 술과 방사능 중에서 어느 쪽에 먼저 당하게 될지 확률은 반반인 셈이지. 지난주에는 술이 우세했는데, 어제 보니까 또 많이 좋아지셨더라고.”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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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6/03/30 22:5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6/04/02 0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6/03/30 22:5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취한배 2016/04/02 00:05 #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님. 오지 마세요.
  • 이즌 2016/03/30 22:57 # 답글

    요조라는 뮤지션이 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나요. 요조 여동생이 몇년 전에 사고로 죽었대요. 그 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같이 "언니, 나 언니티셔츠 입고 나가." "그래 잘 다녀와~" 그랬는데, 저녁에 포크레인에 깔려 즉사했다는 부음을 듣게 되었대요. 얼마나 슬프고 비통했을지 짐작도 안가요. ㅠㅠ 그 사건 이후로 요조는 내가 이렇게 아둥바둥 쫒기며 돈을 왜 벌지? 도대체 왜?부터 시작해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대요. 그리고 자기계발서 문구같은 "오늘 이 순간을 생의 마지막처럼"이란 구절이 단지 머리에서 이해되는 그런 단계를 넘어서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절절하게 다가왔다고 해요. 취한배 님 리뷰를 읽다가 그 생각이 났어요.

    순간순간 충실히 살아간다면 시간도 무시할 수 있다. 지금 죽어도 된다는 마음이 드는군요.
  • 취한배 2016/04/02 00:08 #

    요조 님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술 취해 횡설수설한 글에 긴 덧글 고맙습니다. 쾌락주의자의 강점이라면 이런 것이지 싶어요. 죽음 앞에 별 회한이 없으리라는 거요. 임박한 종말을 예감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가 그것이더라고요. 쾌락주의. 부정적으로 들리기 십상인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봤다고나 할까요,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식의 포기나, 나와 내 가족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아닌 관대함, 강퍅하지 않음, 같은 거요. 좋은 책이고 큰 책인데 작게 만드는 리뷰를 쓴 것 같아 네빌 슈트에게 미안해지는군요.
  • 달을향한사다리 2016/04/04 14:23 # 답글

    이 책은 미뤄야 겠네요...
  • 취한배 2016/04/06 21:26 #

    왜요, 왜요? 해피엔딩이 아니어서...?ㅋㅋㅋ 패스!
  • 달을향한사다리 2016/04/07 15:25 #

    네, 해피엔딩이 아니어서요 ㅋㅋㅋ 완전 해피하게 샤랄라한 내용만 읽고 싶어요, 요즘엔 ㅋㅋㅋㅋ
  • 취한배 2016/04/11 11:51 #

    오늘 날씨가 해피하게 샤랄라하네요. 어두운 인간, 저는 음침하고 삭막한 거 읽고 싶어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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