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검은 피 NoSmoking

불온한 검은 피 
허연 지음/민음사

 

내가 앉은 2층 창으로 지하철 공사 5-24 공구 건설 현장이 보였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몰인격한 내가 몰인격한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 당신을 테두리 안에 집어넣으려 한다는 것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82,「내 사랑은」전문)


초판출간이 1995년이었다는데 하드커버 개정판으로 이제야 만난다. 푸근하게 놓아주지 않고 바짝 긴장하게 하는 글이, 잔뜩 얼어 후덜덜, ‘천국이 아니었던’ 내 지난 어떤 첫 만남 같기도 하다. 분노와 실망이 뒤섞여 정신줄 놓아버린 그 대면 장면과는 달리, 시집의 긴장감은 좋고 옳다. 시다. 시답다. 더 잘 읽고 싶다. 더 잘 쓰고 싶다. 김경주의 김경주 다운 발문은 「진부령」의 마지막 부분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렇다.


먼 불빛들 사이
우뚝 서 있어라. 운명처럼
그대를 사랑한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으므로
(79, 「진부령」부분)


선거철. 여기저기 다 ‘희망’인데, 그래, 시에서는 그러지 말자. 없는 희망이고, 그럼에도 사랑한다. 산책길에 손혜원+정청래 의원을 보았다. 부끄러워서 악수를 청하진 못했다. 손혜원 후보는 당선될 테고, 여전히 희망은 없지만 정치하고 살아가고 사랑하게 되리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이것도 희망인가. 철지난 인기 시집을 읽고 남기는 기록이 뭐 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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