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Smoking

무게 - 10점
재닛 윈터슨 지음, 송경아 옮김/문학동네
 


어쩌다 보니 또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럼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 중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당연히 디오니소스이지. 각설하고. <빨강의 자서전>에서는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이 다시 쓰였고 <무게>에서는 열한 번째 과업이 모티브다.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 있는 금사과를 찾아오는 과업. 헤스페리데스 정원의 열쇠는 아틀라스가 가지고 있고 아틀라스가 금사과를 따오는 동안 헤라클레스가 잠시 세상을 대신 짊어진다, 까지는 신화에서 본 내용.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12)며 윈터슨이 척 꺼내놓는 ‘나-아틀라스’의 첫 문장에서부터 반했다. ‘나의 아버지는 포세이돈이다. 나의 어머니는 대지다.’(25) 짧은 문장으로 착착 이어가는 진행이 간결하면서 몹시 아름답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서 볼 수 없었던 ‘자칭 버지니아 울프’를 살짝 본 듯도 하다. 켜켜이 놓인 시간과 공간을 좌르르 풀어헤치는 묘사가 그렇다. 아름다운 문장이 넘쳐 다 밑줄 칠 수도 없었다. 아틀라스가 지고 있는 세계가 이렇다.


나는 양치류가 단단히 말린 채 잠들어 있다가 몸을 펼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생명으로 부글거리는 웅덩이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내가 이 세계만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세계들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 속의 세계를 지고 있다. 나는 세계의 잘못과 영광을 지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실현된 것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들까지 지고 있다. (39)


약간 상반되는 성격의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 각각의 심리, 둘의 조우 그리고 둘의 결말까지 이 짧은 170여 쪽에 다 담겼다. 윈터슨의 ‘다시 쓰기’에는 두 인물의 자각이랄지, 자문이랄지, 각성 같은 것이 있다. 아틀라스의 ‘만약에 ~한다면?’과 헤라클레스의 ‘그런데 도대체 왜?’가 그것이다.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질문일 터다. 왜냐하면 “신들에게는 아무도 ‘왜’를 물을 수 없”(72)기에. ‘만약에’와 ‘왜.’ 다시 쓰기의 효용이 자리하는 지점도 거기일 것 같다. 머리말에서 윈터슨은,


나는 외로움, 고립, 책임감, 짐에 관해 탐구하고 싶었다. 물론 자유도 탐구하고 싶었다. 내 판본에는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결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야기를 나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꺼내 썼다. 다른 길은 없다. (12-13)


‘매우 특별한 결말,’ 정말이다. ((스포?스포! 이 문단만)) 아틀라스가 스푸트니크의 라이카를 만나는 설정이 너무 좋아 울 뻔했다. 저 광대한 우주 속 ‘외로움, 고립, 책임감, 짐’ 같은 걸 생각하다 윈터슨은 우주로 쏘아 올려진 개 라이카를 떠올렸겠다. 밑도 끝도 없는 고독, 거의 공포에 가까운 외로움을 연상할 때면 나 또한 종종 떠올리는 이름이 라이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라이카를 아틀라스에게 데려다준 윈터슨이 정말 고마웠다.


행할수록 짐은 더 불어난다. 책들, 집들, 연인들, 인생들. 이 모든 것이 내 신체의 가장 강한 부분인 등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나는 운동하러 간다. 나는 내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 나는 내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 나는 내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다. (118)


짐은 더 불어난다. 기력은 쇠한다. 나는 내 무게를 나는 내 무게를 나는 내 무게를… 모르겠다. 오랜만에 든 감기도 들어 올릴 수 없을 지경이다. 아틀라스 앞에서, 그리고 라이카 앞에서 감히 한번만 징징대며 써본다, 귤이 먹고 싶다는 외롭고 외로운 말. 윈터슨은 그 이야기 계속 다시 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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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달을향한사다리 2016/03/08 16:18 # 답글

    음...<오렌지~>보다 이 책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저는 이미 <오렌지~>를 쟁인 지 몇 년이 됐으니 얼른 읽어야겠고...ㅠㅠ
  • 취한배 2016/03/09 14:03 #

    ㅎㅎ네. <오렌지~>보다 저는 이 책. 작년 루스 렌들 사망으로 인해 둘의 우정을 알게 되었고, 목록에 두었던 작가인데 <오렌지~>에서 윈터슨을 너무 살짝 본 감이 있었다면 이 책에서 멋진 모습 보고 반했어요. 사다리 님께도 언젠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때가 있겠지요, 윈터슨.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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