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Smoking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한겨레출판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과업 중 열 번째가 게리온의 소떼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리스 신화 얘기다. 게리온은 몸이 세 개인 괴물로 상정된 존재, 신화들은 흔히 선-악의 대결로 읽히게 마련이고 헤라클레스는 우리 편으로 선, 게리온은 괴물 즉, 악이어서 헤라클레스가 자기 과업을 성실히 이행했다는 짧은 언급으로밖에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빨강의 자서전>은 이 모티브를 이용한 변주이자 앤 카슨의 아름다운 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 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괴물’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각종 이야기들에 얼마나 편리한 장치를 제공하는지 알아야할지도 모르겠다. 혐오의 대상, 신이 가혹한 처벌을 내려 물리쳐도 통쾌감을 느낄지언정 감정이입의 대상으로는 여겨볼 여지가 없었던 추방의 대명사, 제거되어야 마땅한 ‘비천함’으로 존재이유를 가졌던 괴물 말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런 100자평을 내가 썼었는데. ‘많은 변주를 통해 내용을 알고 있음은, 이 우울한 작품을 읽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공포’라고? 원전에서 볼 수 있는 공포라면 ‘괴물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괴물 자신이 느낄’ 공포일 것이다.’ 고대 신화로부터 앤 카슨이 가져온 괴물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게리온은 ‘그의 작은 빨강 날개를 가다듬어’(52-53) 주는 어머니도 있고 ‘사랑하는’ 존재이기까지 하다. 많은 변주 영화들이 쉽게 놓치고 있던 프랑켄슈타인의 극한 외로움, 감정의 주체로서 괴물을 떠올린 이유이겠다.


<빨강의 자서전>은 사랑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주체-객체를 전환한다. 고대 신화 식 영웅과 괴물, 운명, ‘고착된’ 형용사를 비틀어본다. 빈틈을 상상한다. 소위 ‘포스트모던’인가 보다. 저자에 의하면 스테시코로스가 호메로스 식 전통적, 고정적인 형용사를 파괴하여 인물들의 ‘존재를 풀어주었다’(10)고 하는데, 그 내용을 저자에게 그대로 돌려주어도 될 듯하다. 그리스 신화의 변주이고 빈틈이고 상상이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그의 얼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연당한 걸 잠시 잊었다가
이내 기억했다. 토사물이 요동치며
게리온에게로 떨어지다가 그의 썩은 사과 속에 갇혔다. 아침마다 충격이 되돌아와
영혼에 상처를 냈다. (109)





핑백

  • 술집에서 문득 본 진실 : 무게 2016-03-03 21:25:57 #

    ... ;어쩌다 보니 또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럼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 중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당연히 디오니소스이지. 각설하고. &lt;빨강의 자서전&gt;에서는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이 다시 쓰였고 &lt;무게&gt;에서는 열한 번째 과업이 모티브다.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에 있는 금사과를 찾아오는 ... more

덧글

  • 정윤성 2016/02/20 00:54 # 답글

    생각해보니 게리온은 그냥 소를 길렀지 딱히 나쁜 짓을 한 게 있었나 싶네요. 제 기억으로는 지구의 서쪽 끝 섬에 살면서 소를 길렀다는 것외엔 달리 한 일이 없는데... 헤라클레스 나쁘다...
  • 취한배 2016/02/20 22:07 #

    '그냥 소를 길렀지'ㅋㅋㅋㅋ 그죠. 섬에 산 것도 맞아요. 저자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나쁜' 헤라클레스를 약간 냉혹한 연인 캐릭터로 되살려놨더라고요. 그러니까... 게리온의 연인 말이죠. 참신참신했어요.
댓글 입력 영역


moon

CURRENT MOON

뉴스타파

알라딘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