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Smoking

 
캐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그책

 

사랑의 추구. 진정한 행복에 관한 작품. 비웃는 자, 조롱도 오해도 하지 않고 웃는 자가 등장한다. 떨림과 위협, 불안감을 그만의 천부적 재능으로 넘치게 풀어내어 누가 봐도 하이스미스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더 선데이타임스 (뒤표지)


하이스미스임을 단박에 알 수 없었던 나는. 까칠함, 냉혹함, 짤없음, 황량함 등의 단어로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나는.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의 작가를 하나 더 추가하는 대신, 따뜻하고 행복하고 설레는 감정도 이제 하이스미스라는 이름에 포개 넣는다.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에 곧이어 쓰인 작품. 묘사된 캐릭터에 맞춤한 듯한 케이트 블란쳇-캐롤의 등장(영화)이 소설에 앞섰기에 꼼짝없이 블란쳇을 떠올리며 사랑에 빠진다. 러브스토리이고 테레즈의 성장소설이다.


묻고 싶었다. 어떻게 사랑하면 되냐고.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94)


그냥 사랑하면 된다. 솔직하게. (또 쓰고 앉았는데,) ‘밀당’ 같은 거 없이. 하도 ‘뒤틀린’ 하이스미스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저 아름다운 캐롤의 이면에 어떤 얼굴이 숨어있을지 기대하고 읽은 덕에 아마, 더 흥미로웠지 싶다. 이건 스포일러일까, ‘그냥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대신에 하이스미스의 재발견이랄 수는 있겠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빼곡한 추리소설 목록 뒤에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멋진 심리소설작가가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하이스미스, 1월생 작가답게 1월 묘사가 이토록 멋지다.


1월.
이것은 만물의 시작이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1월의 추위는 회색 캡슐 안에 도시를 가두었다. 1월은 순간인 동시에 한 해이다. 1월은 순간순간을 비로 씻어 내려 그녀의 기억 속에 동결시켰다. (…) 1월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 달이다. 어릿광대의 벨처럼 시끄럽고, 얼어붙은 눈처럼 바스락거리고, 여느 시작처럼 순수하며, 노인네처럼 칙칙하고, 신기할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알 수 없으며,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와 같았다. (219)


1월도 지나 2월이고, 가까운 극장에 <캐롤>이 절찬리 상영 중인 설이었으나, 영화 관람까지는 그만두기로 한다. 구체화, 시각화된 장면들이 내 아름다운 상상의 순간들을 배반할까봐 두렵다. 특히 캐롤의 신비함과 테레즈의 변화 같은 거. 테레즈는 사랑을 겪으면서 더 강해졌고 아름다워졌고 나이를 먹었다. 성장소설 맞다. 사랑은 성장하게 한다. 꼭 열세 살이 아니어도.


캐롤이 ‘등장’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새로 태어난 기분도 들고 부끄럽기도 했다. 맞다. 캐롤이 떠난 후 테레즈는 새로 태어났다. (437)


기어이 쓰지 않고자 한 단어가 하나 있었고, 쓰지 않았다. 사랑에 관한 한 필요치 않고 무의미한 단어라고 생각해서다. 물리학 박사 대니도 나오는 김에 용어 그대로 ‘케미’를 갖다 쓸 수는 있겠다. ‘특정 원자끼리는 결합하지만 어떤 원자는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187)일뿐이다. 하이스미스가 그려주는 테레즈와 캐롤 간 케미, 예컨대 ‘오직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아무렴. 영화와 소설 모두의 안녕을 위해 말은 이만 줄이기로.




1995년 2월 4일. 토요일이었을 거다. 내가 파리에서 처음 오렌지를 사고 있던 무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당신을 알지 못했다. 빌리가 부르는 ‘테레즈의 노래’(212) 듣는 홀리데이다.








덧글

  • 2016/02/09 04:34 # 삭제 답글

    하이스미스의 글을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행운인가요? ㅎㅎ 집에 콕 처박혀서 크리스티 전집이나 읽고 싶은데 어찌 주말은 하는 것도 없이 이렇게 훅 지나간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배님. 뒤틀리지 않고 솔직한 사랑 가득한 올해 되시길 빕니다.
  • 취한배 2016/02/09 15:22 #

    하이스미스는 포 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용? 특히 <리플리> 시리즈는.
    하는 것 없이 훅 보내라고 주말인 듯요;;ㅎㅎ
    설날이라고 멀리서 유난히 적적하시진 않았는지요? 포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 다다 2016/02/09 05:31 # 답글

    앗! 빌리 홀리데이, 오랫만이에요.
    전 <캐롤> 보다 <화재감시원>을 읽어보고 싶어요.
    한 올 한 올 글자로 수를 놓는 듯 쓴
    취한배님 리뷰를 대할 때마다
    정갈한 마음으로 각 잡고 보고 있어요. :)
  • 취한배 2016/02/09 15:24 #

    소설에서 '캐롤을 향한 테레즈의 감정이 모조리 담긴 곡'이라며 나오는 노래예요. 영화에서도 아마 멋지게 흐를 듯요. 다다 님도 <화재감시원> 읽게 되면 리뷰 써 주세용.
    '정갈한 마음으로 각 잡고,' 크- (부담+)영광입니다! 고마워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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