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글라스 Smoking

닥터 글라스 - 10점
얄마르 쇠데르베리 지음, 공진호 옮김/아티초크
 

일기 형식. 내면 고백. 도덕에 대한 물음. 소유하지 않는, 소유하길 두려워하는 사랑의 한 방식. 극한의 낭만이랄지, 도도하고 고고하고 세련됐다. 테레즈 라캥 조금, 죄와 벌 약간. 그리고 더 매력적인 건, 그 둘보다 짧고 멋지다. 처음 보는 이름 얄마르 쇠데르베리, 생소한 북국, 그러나 예상과 달리, 찌는 여름날의 일기. 가을 바람과 함께 끝나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그 대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내 마음을 전하지도, 나를 보아달라고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말 걸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한다. 그저 바라보아야만 하리라. 오스카 와일드를 또 가져오자면, 글라스는 와일드의 두 가지 비극 중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비극’을 택한 셈이겠다. ‘꿈의 성취와 욕구의 충족,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모든 것은 깊숙한 본능의 관점에서 보면 추하고 상스럽다.’(29) 와일드 식 유미주의로는 두 비극 중 덜 비참한 비극이렷다. 고고하고 도도한 아름다움은 아마도 그래서인가보다. 글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친구가 더 잘 안다.


“(…)자기는 행복에 재능이 없으며 또 그 사실을 잔인하고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네. 그런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아, 그저 자신들의 불행에 어떤 형식과 스타일을 부여할 뿐이지.”
그러고 나서 그는 불쑥 한마디를 보탰다. “글라스가 그런 사람이지.” (122)


자초하는 불행, 형식과 스타일을 가진 불행,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 이상적인 상태로, 훼손하지 않으려는 사랑. 그러나 결코 ‘식물 같은’ 사랑은 아니어서 무언가 있는데, 의지다. 더 정확히는 의지의 실현. 도덕을 따져 묻는 과정이 여기에 온다. 분열증적 자아와의 대화에서 죄와 벌, 테레즈 라캥을 소환하면서 글라스는 이미 라스콜리니코프이고 로랑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사랑-관찰. 관찰자-주체에게 중요성을 돌려주기도 한 양자이론에서 본 바에 따르면,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 글라스는 이미 개입했다. 매우 깊이.


어제 읽었고, 오늘 쓰는데,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초라한 독후감인데도. 좋은 책은, 아니, 좋아하게 된 책은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책장을 덮고 나서 말문이 좀 막히는, 마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율신경계가 더욱 자율적이게 되는 것 마냥 그렇게. 아티초크 픽션, 디자인도 편집도 번역도 근사하다. 취향이다.


그녀는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그녀는 나를 보고 부끄러워한 적도 없고 그녀를 창백하게 만든 사람도 내가 아니다. 그녀가 마음의 번민을 안고 한밤중에 내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러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생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229)







덧글

  • 다다 2016/02/04 01:25 # 답글

    초크초크초크 초크초크 칩!

    와인 잔에 담긴 적이 없는 것은?

    ① 포두주
    ② 막걸리
    ③ 소주쥬스
    ④ 커피
    ⑤ 물

    앗, 옥의 티 발견! 자율신경계가~ 구절을 보시얌!
  • 취한배 2016/02/04 19:05 #

    1번 '포두주'는 담긴 적이 없슴미다.ㅋㅋ
    자율신경계가~ 구절 수정했어요, 땡스!
  • ㅊㄱ 2016/02/04 08:35 # 삭제 답글

    앗, 저 이 책 읽어야지 싶어서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있는데, 이 리뷰 읽어보니 꼭 읽어야겠어요. 완전 제 취향일 것 같아요. 게다가 저 역시 '너무 좋아하는 사람의 포지션은 좀 멀리에 두자'라고 생각했었던 사람이라서,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그 대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라는 문장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실 이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는데. 하하하. 아 몹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 취한배 2016/02/04 19:09 #

    아항. ㅊㄱ님도 담아두신 책! ㅎㅎ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보아주세욤, 아시죠? 읽고 나면 사진에서처럼 저렇게 표지가 혼자 열려있는 소프트커버...인데 그것까지 좋아요. 작고 가볍고 예쁘고. 휘리릭 잘 읽혀서 ㅊㄱ님 하루 출퇴근길이면 완독하실 듯요. 그나저나 ㅊㄱ님께 포도주+초코과자보다 더 취향인 책이라늬효; (초코칩 실패!) ㅋㅋㅋㅋ
  • 달을향한사다리 2016/02/05 15:09 # 답글

    '그 대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 갖게 되면 변질이 시작되는 게 바로 사랑인 것 같아요...

    마지막 인용문 완전 제 취향이에요^^
  • 취한배 2016/02/06 12:39 #

    그런데 그런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사랑을 실현, 실천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그죠? 흙흙. 마지막 인용문이 취향... 슬퍼요! ㅜㅜ
    도서관에 신청하셔서 사다리 님도 즐독하시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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