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감시원 Smoking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아작

 

성냥이 갖고 싶었고, 인터넷 서점 카드 결제가 계속 먹통인 김에, 곰군찬스. 땡스. 성냥이 왔고, <화재 감시원>도 따라왔다. 편집과 만듦새가 좋아 코니 윌리스의 변화무쌍한 작품들과의 만남이 더욱 기뻤다. 구할 수 없었던 <개는 말할 것도 없고>도 덩달아 다시 나와 주면 좋으련만.


정성스럽고 겸손하고 따뜻한 서문에서 작가가 잘 언급하고 있듯, ‘유일한 공통점은 내가 썼다는 사실’(7)밖에, 다섯 편의 중단편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테마는 없다. 산만한 듯 따뜻했다가(<리알토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바치는 오마주는 으스스하고(<나일강의 죽음>) 미래소설 같은 스산함과 황량함도 보여주다가(<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 이름 없는 개개인의 작은 행동들이 만든 게 결국 역사라는 관점을 감동스럽게 그린 시간여행(<화재 감시원>), 그리고 과학과 심령술을 재치 있게 조합하여 놓은 미스터리(<내부 소행>) 까지, 역시 ‘그랜드 마스터’의 과학소설집이다.


평소 내 취향으로 보자면, 어둑하고 황량하며 음침한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가 으뜸일 텐데 가장 짧은 분량의 이 이야기가 한 가운데 놓였고 앞으로는 양자 물리학과 애거사 크리스티, 뒤로는 시간여행과 심령술이 오면서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다. 일관적으로 흐르는 기조가 있지 않고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내게는 작품의 배치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책을 열고 순서대로 볼 경우 처음 만나게 되는 <리알토에서>에서 발췌문 하나.


충돌 후에 전자가 어디로 갔느냐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설령 전자가 할리우드 대로와 바인 가 교차로에서 반대 방향으로 갔다 하더라도, 설령 자기를 감추기 위해 창가에 메뉴판을 세워놓았다 하더라도, 다른 전자는 적색 치커리에서 그 전자를 구출해내어 도넛을 사주었을 것이다. (54-55, <리알토에서>)


‘할리우드 양자 물리학’이랄까. 기본적으로 ‘이야기’인 역사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과학이론을 읽을 때에도 문학적인 사람은 이야기를 보는 모양이다. 전자(電子)에 사람을 대입해 양자 물리학을 엮어내는 솜씨라니. <리알토에서>의 초반 어리둥절함은 카프카의 <성>으로 가지 않고, 따뜻한 해피엔딩의 <벤지> 9편 상영관으로 가 끝난다. 수미상관, 비슷하게 훈훈한 사랑이야기가 마지막 작품 <내부 소행>에서도 심령술-과학의 공방전으로 펼쳐진다. 매 작품 끝에 작가의 후기가 실려 있는 것 또한 큰 미덕인데 내게는 특히 여기가 그랬다.


나는 H. L. 멩켄이 정말 그립다. 지난 40년간 (닉슨과 워터게이트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내 동료 인간들을 관찰하면서 “빌어먹을 멩켄은 꼭 필요할 때 대체 어디에 가있는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무덤에서 돌아와 지금 정말 필요한 말들을 던져주기를 필사적으로 기원했다. (364, <내부 소행> 후기)


‘멩켄’이라기에 처음에는 나치 의사 ‘멩겔레’를 떠올리고 잠시 긴장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헨리 루이스 멩켄(H. L. Mencken, 1880. 9. 12 ~ 1956. 1. 29). 미국의 언론인이자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아마도) 과학적 회의주의자. 저 생몰기라면, 멩켄의 한창 활동기가 아서 코난 도일 경의 말년과 겹칠 터인데, 바로 심령술이 공통분모이겠다. 줄리언 반스 <용감한 친구들>에서 보았던 코난 도일 경의 심취. 내 상상 속에서는 이 둘의 공방전이 마구 펼쳐질 기세. 



‘절실하게 뭐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331)과 그 비합리성 및 사기행각을 파헤치는 과학적 회의주의 잡지 발행인의 이야기가 <내부 소행>이다. 셜록 홈즈가 어울릴 듯도 한 테마까지도 ‘그랜드 마스터’가 요리해주시니 달콤한 디저트가 된다. 코니 윌리스가 훑어주는 멩켄만으로 벌써 이 사람이 좋다. ‘나에게 과학적 관점은 충분한 만족을 준다. 기억하는 한 항상 그랬다. 지금껏 내가 살면서 다른 곳에서 도피처나 기댈 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289)는 멩켄. <멩켄의 편견집>(이산, 2013)을 알게 되고 보관함에 갖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반갑고, 환영해요, 코니 윌리스.


이 작가들이 없었다면 내가 그동안 써왔던 어떤 작품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 단편집을 읽을 때, 어찌 보면 내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가들의 작품까지 읽는 것이다. 최소한 그들이 조금이나마 내게 스며들어 있기를 바란다. (…)
그러니, 재미있게 읽으시라! 이 단편들을 다 읽고 나면 필립 K. 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와 C. L. 무어와 헨리 커트너의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 킷 리드의 <시간여행사>, 시어도어의 <고독의 비행접시>를 읽어보라. 그리고 다른 멋진 SF들도 찾아서 읽어보라. (15, 서문)


네.





덧글

  • 다다 2016/02/02 17:41 # 답글

    취한배님의 한 땀 한 땀 공들여 쓴 근사한 리뷰를 보니, 이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오늘 회사 라면데이라서 전 라면 먹으러 갑니다요. 나중에 건배할 수 있으면 해요.
    와인 사러 나갈거예요. :)
  • 취한배 2016/02/02 19:16 #

    한 땀 한 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ㅎㅎ 음... 과학'소설'인데 괜찮겠어요? 비소설독자다다 님?
    '회사 라면데이' 훈훈하네요. 저도 라면 먹고 왔어욤.
    건배합시다, 저도 지금 포도주!
  • 다다 2016/02/02 22:01 #

    편의점에 파는 포도주 디아블로 괜찮네요.
    가격대비 만족. 적당한 바디감이 좋아요.
    다음에 생각나면 마시겠어요. :)
  • 취한배 2016/02/03 18:58 #

    디아블로는 저도 애용(?애음?)하는 포도주랍니다.
    가격대비만족에완전동감요.
    비슷한 가격대에선 '두로'(포르투갈)나 '마푸'(칠레)도 괜찮을 겁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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