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직업 NoSmoking

삶이라는 직업 
박정대 지음/문학과지성사

 

그러니까 이건 실제적인 것이다. 하나의 성냥불이 켜지고 세계가 잠시 밝아질 때, 그 희미한 밝음의 힘으로 지구가 조금 자전했을 때, 몇 마리의 새가 안간힘으로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 오르고 있을 때, 나는 잠시 내 영혼이 정박했던 그대라는 항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15,「봉쇄 수도원」부분)


몇 번이나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작년 말, 그러니까 겨울답지 않은 겨울 날씨 무렵부터 좋이 열 번은 열었다 닫았다. 언제쯤 내게 와 닿을까 하면서. 언제 만나느냐가 중요한 건 사람만이 아니고 시도, 시가 그렇더라. 한파가 서울에 온 어제 오늘 드디어 박정대 시인을 정식으로 만났다. 『삶이라는 직업』은 눈이고 나타샤이고 겨울이고 특히 1월이고 고독이며, 취기인 듯 헛소리인 듯 실험인 듯, 시다. 추운 날 취해가면서 읽기 좋은.


땔감이 아주 많이 쌓여 있는 훌륭한 밤입니다
겨울 내내 땔 수 있는 땔감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지요 (157,「나타샤 댄스」부분)


온기, 마음, 의지 같은, 땔감이 있는지는 사랑해봐야 알게 되기도 한다. 땔감이 많은 줄 알았는데 빌어먹을, 엔트로피 법칙을 능가할 땔감은 되어야 사랑이라는 말, 할 수 있음은, 사랑해보고 알았다. 작용-반작용. 네 땔감이 별로더라는 말은 내 땔감이 그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당신보다 내가 더 소중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차이일 뿐, 아닌가. 모르겠다. 그럴지도. 그럼에도.


담배를 많이 피웠거나 밤하늘의 별을 너무 오래 쳐다보았거나
가슴이 아프다, 그냥 가슴이 많이 아프다 (133-134,「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부분)


한파의 오후 홍대. 젊고 예쁜 영혼들은 어쩜 하나같이 추위와 상관없어 보이던지. 바지 끝단과 신발 사이 노출된 맨살 발목들이 춥지 않은 게 젊음인가, 싶었다. 부디 네 발목은 춥지 않기를. 땔감이 넉넉하기를. 꼭 나를 위한 것 아니더라도. 모든 가능성의 거리 아직 가늠해보는, 취한 겨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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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락방 2016/01/21 10:23 # 삭제 답글

    네 땔감이 별로더라는 말은 내 땔감이 그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저는 박정대 시인의 시집이 어려웠어요. [모든 가능성의 거리] 가 그러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무슨 호텔..하는 시는 좋았었던 것 같고요.
    네 땔감이 별로더라는 말은 내 땔감이 그러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 여기와 깨닫습니다.
    그러네요. 고개 끄덕입니다.
    아울러,
    겨울, 취한 밤.
    좋아요.
    겨울, 취한 밤.
  • 취한배 2016/01/21 12:38 #

    모든 책이 그럴 텐데, 시집도 언제 만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와 닿을 때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삶이라는 직업>은 1월의 시집이라고 감히 써봅니다. (무슨 호텔..하는 시가 좋았던 건 다락방 님이 호텔(조식)을 좋아하셔서...ㅋㅋ)
    네 마음-땔감은 왜 그 정도밖에 안되느냐, 내 의지-땔감을 두 배로 때 봐도, 그게 상대에게는 ‘짜증스러움’이 되더군요. 땔감, 잘 사용해야 둘 모두에게 온기가 되는 것을요.
    다락방 님의 겨울, 취한 밤도 따뜻하기를 바랍니담 :)
  • 다다 2016/01/21 19:21 # 답글

    어려워요. ㅠㅠ

    문지에서 나온 시가 저에겐 대체로 어려운데,
    '머리'에서 나온 시가 대체로 제게 어렵더라구요.
    근데, 이 시는 '가슴'에서 나온 시 같기도 하네요.

    출근할 때 보니까, 회사 앞 마트에 와인이 들어왔더라구요.
    살까 말까 만지작 만지작 하다 돌아섰지만요.

    앞으로 와인 리뷰를 올려야겠어요. 와인 공부도 하는 겸. 히히.
  • 취한배 2016/01/21 21:26 #

    맞아요, 이 시들은 가슴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해요. 겨울 고독이 줄줄줄 읊어대는 가슴.
    회사 앞 마트에 와인, 축하합니다!ㅎㅎ 만지작만지작하시다가 사게 되는 날이면 제게도 건배 한 번 외쳐주시길. 그런데, 와인 공부;; 킁킁. 공부보다 저는 흡입하여 제 일부로 만드는 걸 더 잘하고 좋아합니다!ㅋㅋㅋ
  • 다다 2016/01/21 22:54 #

    물론, 공부라 함은 마시는 게 으뜸이지요. ㅋㅋㅋ
  • 취한배 2016/01/22 15:58 #

    그래서, 언제 '공부'하실 거예욤? 내일? ㅎㅎㅎ
  • 다다 2016/01/22 16:38 #

    내일 건배해요. '약주' 드신다면. ㅎㅎㅎ
  • 다락방 2016/01/21 21:41 # 삭제 답글

    측근님!!!!!
    저 지금 술마셔요!!
    친구랑 둘이 와인 두 병째!
    건배하러 왔어요. 건배!!
  • 취한배 2016/01/21 22:00 #

    으앗. 전 지금 소주칵테일. 건배!!
    다락방 님의 '겨울, 취한 밤'을 알려주러 오셔서 고마워요.ㅜㅜ(감격)
    따뜻하신가요?! 그러하시길!
  • 2016/01/22 06:04 # 삭제

    같은 시간대에 술마시고 건배하는거 넘 부러움 ㅠㅠ
  • 취한배 2016/01/22 15:58 #

    다른 시간대에 계신 포 님 이른 아침해장술과 저희 저녁술, 또는 그 반대가 만날 수도... 노력해보아요, 우리. 건배! ㅋㅋ+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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