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Smoking

파묻힌 거인 - 8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시공사
 

망각에 대한 이야기. 기억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희구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 집단 망각을 획책한 왕의 이야기. 그러니까 가짜 평화와 진실 사이의 강을 건너는 이야기. 용과 도깨비와 전사(戰士)가 출현하는 가즈오 이시구로인데 <남아 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의 가즈오 이시구로이기도 한 이야기.


“난 그 애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액슬이 말했다. “분명 모든 게 이 안개 때문일 거요.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 (49-50)


<무진 기행>도 아닌데 안개가 짙다했더니 용이 뿜어내는 입김이다. 그 속에서 배경도 노부부의 사랑도 애틋하고 아름답다. 안개는, 꿈같이 아스라하고 멋진 배경을 이루는 동시에 어쩌면 편리하고 예쁜 망각이다. 기억을 잊고 서로 사랑하는 부부와 과거의 분노와 증오심을 잊은 채 어울려 사는 민족들.

파묻힌 거인은 파묻힌 기억인가. 캐내어 바로 잡으려는 영웅이 필요한. 용의 목을 치는, 칼을 가진 전사는 한 명이지만 망각을 벗어나기를 원하고 행동하는 손과 발걸음은 여럿이다. 기억을 찾으려는 노부부, 잊힌 분노와 증오심을 일깨우려는 전사, 망각으로 가족을 잊고 떠도는 부모의 자식들, 소중한 기억을 잊어 남편과 함께 배를 타지 못한 부인들…….


“하지만 오래된 과거고, 이제는 죽은 뼈들도 기분 좋은 푸른 풀밭 카펫 아래 편히 쉬고 있다오. 젊은 사람들은 그 뼈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 자비를 베풀어 이 땅을 그냥 두고 떠나요. 이 땅이 망각 속에서 쉴 수 있게 해줘요.” (426-427)


기억하는 한, 있었던 사실이 없는 게 되지 않는다. 그러한 원리를 너무 잘 아는 권력자는 자신의 치부를 영원히 지우고자 모든 사람을 망각으로 이끈다. 잊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짜 휴식, 가여운 행복, 믿고 싶은 사랑, 아슬아슬한 평화. 과거를 묻으려는 공작. 판타지 소설에서 어쩔 수 없이 현재를 읽는다. 기억, 과거, 역사에 관한 우리 지금-여기를.

오늘 기상 정보, 미세먼지 ‘나쁨’ 수준의 안개, 연무다. 단순히, 연무인가. 우리 안개는 어느 용이 뿜어내는 입김인지, 안다. 파란 지붕을 한 돌무덤에 산다고 전해지는 왕이 그 주인이라는 전설. ‘거인’은 파묻힐지 몰라도 파묻은 사실까지를 묻을 수는 없다. 파묻히는 거인이 많아질수록 용의 목을 치려는 전사와 소년과 노부부와 고아와 과부들 또한 그만큼 많아지리라. 안개가 짙다. 목이 칼칼하다.


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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