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 잔혹극 Smoking

활자 잔혹극 - 10점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북스피어


단편집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이후, 그리고 작가의 타계 이후 읽는 장편이다. 1977년작, 아이, 참. 대단하다. 장 주네의 <하녀들>로 유명한 실화, 파팽자매사건(1933년)의 변주로도, 그와 상관없이도 대단한 루스 렌들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이 작품을 염두에 두고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1995)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렌들의 유니스 파치먼과 슐링크의 한나가 꽤 닮아 있어, 장정일의 발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를 마쳤다.


그러니까,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의 자폐적인 공감부족과 자신의 문맹이 밝혀졌을 때 느끼는 굴욕감이 폭력적으로 발휘되는 무시무시한 얘기다. 무시무시한, 그러나 그 굴욕감이 백번 이해되는 방식으로. 굴욕감은 무언가 변화시킨다. 극단적으로는 죽음까지 갖고 올 정도로. 그게 자신의 안쪽으로 향하든지 바깥쪽으로 향하든지 할 텐데, 유니스의 반응은 바깥으로 향했다.


슐링크의 한나에게 미하엘이 있었듯 렌들의 유니스에게는 조앤이 있다. 사랑이든 아니든 두 쌍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미하엘과 조앤은 한나와 유니스의 문맹을 알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한나와 유니스가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대상이라는 점. 이건 사랑 이상의 감정이리라. 조앤이 미친 여자라는 사실은 유니스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도 유니스에게 중요했던 적 없다. 유니스는 ‘숨 쉬는 돌이었다.’(206)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안도한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었다. 조앤은 모르고 있어. 아직 그 소식을 못 들은 거야. 그녀는 긴장이 풀려 창백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순간만큼은 조앤에게 거의 사랑을 느낄 정도여서, 아무리 해도 보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89)


영리했다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뎌서 조앤이 유니스의 문맹을 알지 못하는 사실로 인해 유니스에게는 특별한 애착상대가 된다. 조앤의 광기와 유니스의 굴욕감이 이루어내는 클라이맥스. 칼이 아니고 총이다. 사냥을 즐기던 부르주아계급의 자충수. 아무리 선의로 다가오는 사람이라 해도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는 소통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존재하는 한 굴욕감 역시 지속될 터, 유니스는 자신의 바깥으로 향한 파멸을 완성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글 읽기-감정 읽기 관계항으로 풀어가야 좋을 책이겠으나 유독 내 눈에 굴욕감이 더 들어온 건 어쩔 수 없다. 금주 2주차다. 굴욕감에 대한 반응이 내 안쪽을 향하고 있음이다. ‘문맹의 장점은 본 그대로 기억하여 거의 완전하게 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이다.’(43) 알코올 의존증의 장점은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치료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숨 쉬는 돌, 유니스까지도 사랑할 것만 같다. 굴욕감은 자신이나 상대를 파괴하든지 스스로를 발전시키든지 할 것이다. 열등감과도 비슷하게. 루스 렌들의 놀랍고도 고마운 <활자 잔혹극 A Judgement in Stone>이다.


잠시 동안 두 여자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작은 푸른 눈과 날카로운 회색 눈이 부딪쳤다.
“블랙 매직 초콜릿 일 파운드짜리 박스 하나요.”
열정 때문이든 고통 때문이든, 이익이나 불운 때문이든, 서로 맺어지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진부한 말로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지.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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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락방 2015/11/09 09:47 # 삭제 답글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 안나는데 측근님의 극찬으로 '아, 나는 뭐라고 써놓은 게 있으려나?' 싶어 검색했더니 페이퍼가 있긴 있네요. 근데 그 페이퍼 만으로는 제가 이 소설을 좋아했는지 아닌지모르겠어요.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제가 막 좋아했던 책은 아닌 것 같아요.

    저도 당분간은 좀 금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토요일에 너무 마시고나니 지금 당장은 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요.
    남동생과 저도 수시로 얘기했어요.
    우린 알콜 의존증인가? 중독 까진 아니어도 의존증이긴 한 것 같지? 하고요.
  • 안취한배 2015/11/10 00:49 #

    이 책에는 리뷰와 페이퍼가 하도 많아서 측근님 페이퍼 찾아볼 생각을 못했네요. 중고로 산 거라 땡투할 필요도 없었기에. (찾아보고 옴) 음. 좋아하셨는지 분명하지 않은 기승전육포...ㅎㅎ
    당분간의 금주는 매우 옳지요. 몸을 위해서도, 더 즐거운 다음 음주를 위해서도. (뭐라는 거냐.) 어울려 마시는 술도 그렇지만 저는 혼자 마시는 술의 양이 엄청났거든요. 몸이 신호를 보내오기도 했고요. 측근님도 혹시 심각하다고 여겨지시면, 금주 응원합니다. (저의 지금 금주계획은 올해 마지막 날까지예욤. 자기와의 약속이나 다짐 같은 거 공개적으로 하면 더 효과적이라기에 부끄럽지만 막 써 봅니다. ‘금주소네트’ 같은 건 거의, ‘난 쓰레기’라고 고백하는 기분이기도 했답니다.)

    p.s. 비밀글이 안 되어서... 시, 고기도 씨가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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