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말 NoSmoking

보르헤스의 말 - 8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마음산책

 

“스베덴보리가 그랬지. 신이 우리에게 뇌를 주신 건 망각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9, 서문 중 보르헤스의 말)


원죄, 아니 원제는 ‘Borges at Eighty’인 모양인데 우리말 제목 정말 좋다. ‘글’로만 접했던 한 명의 작가를 자연인으로 성큼 데려다주는 게 ‘말’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글(작품)을 보충해주는 말(인터뷰)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더구나 말년에 시력을 잃고 말(구술)로 글(작품)을 썼던 보르헤스를 생각하면 ‘호메로스의 말’이나 ‘소크라테스의 말’과도 같은 아우라까지 느껴진다. 최근에 읽은 샐린저와는 확연히 대비되게 ‘말’이 많았던 게 고마울 정도로. (‘말’이 없었던 작가는 그 나름으로 또 매력적이고 그것까지 고맙다고 나는 쓸 것이 틀림없는데. 작가와의 만남에 있어 좋은 글-작품이 우선인 건 확실한 것 같다.)


여든의 보르헤스, 즉 80년과 70년대 말의 인터뷰가 묶였다. 보르헤스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사적인 보르헤스’에 가깝다고 해도 되겠다. ‘매우 관대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248) 속에서 말하고 또 말한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때로는 반복해서. 머릿속 도서관에서 시구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 도서관에 보르헤스 본인의 작품은 없다. 인터뷰어나 청중이 보르헤스의 작품을 보르헤스에게 환기해주는 장면이 따뜻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나요? 그런 말을 했기를 바랄게요!”(135)


사적인 보르헤스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연상하는 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자신을 형상화한 인물이 푸네스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푸네스를 쓰고 나서 불면증에서 벗어났고, 미치지도 않았으니까. 망각하면서 행복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여든 살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매일 아침, 잠에서 빠져나오며 ‘정확히 그 어떤 사람이 되어야’(44) 하는 피곤한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존재의 유한성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난 그러한 것들을 희망적으로, 기대하는 심정으로 생각해요. 나는 죽음을 탐낸답니다. 매일 아침 깨어나 ‘흠, 내가 여기 있군, 다시 보르헤스로 돌아가야겠네’라고 반복하는 걸 멈추고 싶어요. (44)


노년의 작가를 대하는 건 늘 숙연해지는 일일 터이나 이 ‘말’ 책은 일부러 무게를 잡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우정이 흐르고 유쾌하기도 하고 당연히 지적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보여주던 꿈, 상상력, 기억, 시간, 문학에 대한 답을 듣고자 기대했던 것 맞다. 미로, 글, 거울에 관한 보르헤스의 악몽-잠, 기억-망각, 시간이나 문학에 대한 답을 일부 들은 것 또한 맞다.


‘말’을 들으면 늘 드는 생각이 줌파 라히리의 신간에 제목으로 온 걸 보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마음산책, 2015). <보르헤스의 말>은 보르헤스의 글보다 작다. 글에 대한 말의 ‘원죄’다. 사적인 보르헤스를 ‘듣고’ 나서 남는 감상은 의외로, 겸손함이다. 허세를 부린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교클럽에 있는 것처럼 겸손한 언사’(249, 리드)가 한결같다. 상상력과 낯섦의 우주를 창조해냈던 공적인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남겨진 건 얼마나한 축복인지. 사적인 보르헤스의 소탈한 말이 이렇게 우리에게 온 것 만큼이나. 거장의 겸손함 앞에, 그의 글보다 작은 그의 말에 관한 나의 글은 또한 얼마나 작은지.


청중: 문학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르헤스: 문학은 아주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인간 정신에 꼭 필요한 것이니까요. (14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1899-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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