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니와 주이 Smoking

프래니와 주이 - 8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문학동네

 

샐린저가 원래 이렇게 따뜻했었나. 어렴풋 남아 있는 <호밀밭>의 뾰족함은 내 기억의 왜곡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래니와 주이> 즉, 주이의 ‘글로 쓴 홈비디오’(66)는 형식이 소설이지만 거의 희곡으로 읽힌다. 전ㆍ현직 배우 가족의 극적인 대화, 제한된 공간(무대), 지문 같은 보충문장, 카타르시스까지. 유진 오닐에서나 읽을 법한 가족극 말이다. 그나저나 저 카타르시스라는 것. ‘뚱뚱한 여자’가 그 비밀인데, 그것이 위안이 되고 ‘환희’(253)가 되는 이 과정이 어떻게 가능한지? 아직은 성급한 일. 우선.


글래스 가족은 전직 배우인 레스+베시 부부 슬하 일곱 남매로 이루어진다. 전원이 과거 라디오 방송 <지혜로운 어린이> 출연을 거쳤다. 일곱 남매의 막내가 프래니이고 바로 위 오빠가 주이로, 프래니는 연극 전공 학생, 주이는 현직 배우다. 맏이 시모어는 7년 전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 직업 작가로 멀리 살고 있는 둘째 버디가 이 남매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으로 ‘버디와 통화하고 싶니?’라는 대사가 빈번하다. 극이 진행될수록 시모어에 대한 그리움과 그림자가 맨 아래 두 남매 위로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게 참 예쁘고 아프다.


“프래니, 어떻게 할까? 버디 계속 연결해볼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계속 벼룩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그녀가 주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잘 들리지 않게.
“뭐라고?” 주이가 물었다.
프래니가 되풀이해 말했다. “나 시모어와 얘기하고 싶어.” (191)


속물적인 성공과 허세에 이미 환멸을 느끼는 스무 살 프래니, 속세를 혐오하며 자꾸 기도하려는! 프래니가 집에 왔다. 출가한 남매들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한, 지금은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있는 중인 낡고 텅 빈 집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나이 든 어머니 베시, 그렇지만 여전한 ‘잔소리’와, 출가하지 않은 젊은 오빠 주이의 대화들이 내용을 이룬다. 막내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주이의 ‘홈비디오’이자 연기자 선배로서의 기꺼운 충고 같은 것.


“(…)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어떠한 의미에서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250)


이제 저 카타르시스로 돌아오자. 열쇠말이 되는 ‘뚱뚱한 여자’는 위에서 말한, 그들 위로 드리워진 시모어의 그림자, 그리움이기도 하다. 어린 남매들에게 ‘뚱뚱한 여자’를 위해 구두를 깨끗이 하고 최선을 다해 연기하라고 했던 큰 형이자 큰 오빠. 뚱뚱한 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남매는 ‘포치에 하루 종일 앉아 찰싹찰싹 파리를’ 잡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라디오를 최대한 소리 높여’ 틀어놓는 암에 걸린 한 여자’(252)를 연상하곤 했고 이제는 그 여자가 그리스도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면서 (자꾸 기도하려는) 프래니는 해답을 본 듯하다.


시모어의 그림자+버디인 척 하는+주이의 목소리로 막내 프래니는 환희에 잠긴다. 주이는 ‘가이드’에서 이 작품이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도, 종교적으로 신비화된 이야기도 전혀 아님을 밝힌다. 나는 이것이 복합적이거나 다각적인, 순수하면서도 난해한, 사랑 이야기임’을(68) 얘기했다. 염세주의로 신경증에 빠진 집안의 막내 예술가 구하기, 가족 이야기이자 사랑 이야기, 맞다. 더 나아가 예술이 지향하는 바나 예술가의 자세 같은 것까지도 살짝 엿보았다.





P.S.
싱글들을 위한 추석 보너스 트랙. 이번에도 고생들 하셨는지?


“난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좋겠구나.” 글래스 부인이 불쑥 아쉬운 듯 말했다.
글래스 가족은 모두 -주이는 더더욱- 글래스 부인이 내리는 이런 종류의 난데없는 결론에 익숙했다. 그녀의 난데없음은 특히 이렇게 울컥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한가운데서 최고로, 가장 절묘하게 꽃을 피웠다. (…) “글쎄, 난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안 할 이유라도 있니?”
주이가 자세를 누그러뜨리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리넨 손수건을 꺼내 펴더니 손수건에 대고 코를 한 번, 두 번, 세 번 풀었다. 그가 손수건을 치우며 말했다. “난 기차 타는 걸 너무 좋아해서요. 결혼하면 기차에서 절대 창가 자리에 못 앉거든요.”
“그건 이유가 못 돼!”
“완벽한 이유예요. 나가세요, 베시. 혼자 조용히 있게 해줘요. 나가서 멋지게 엘리베이터라도 한번 타지 그래요? 그리고 그 망할 담배 끄지 않으면 손가락 데겠어요.” (136-137)




덧글

  • 2015/09/28 19:51 # 삭제 답글

    하하하 ps 가 절묘하네용ㅋㅋㅋ

    방 진짜 깔끔한듯. 책 사진 볼 때마다 아 왜 내방은.. 하며 한번 둘러보게 되는 ㅋㅋ

    그런데 사고로 죽은 넷째보다 시모어를 더 그리워하나요? 불쌍한 넷째 ㅠㅠ
  • 취한배 2015/09/28 22:18 #

    포 님도 한국에 있었으면 당하고 말았을 일?ㅎㅎ
    방이... 더러운 데는 화면에 안 들어가게 하는 게 관건. 크흡.
    넹. 어린 두 남매가 아이였을 때부터 이미 어른이었던 시모어의 공백이 이들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넷째는 역할도 없는데 줄거리에 들어갔네요? 없애야겠다,,,ㅎㅎ
  • 레그나 2015/09/29 00:54 # 답글

    시모어는.. A perfect day for bananafish의 시모어인 걸까요..?
    접해 보지 못한 샐린저의 글인데, 읽고 싶어지네요.
  • 취한배 2015/09/29 01:48 #

    넴. 샐린저의 단편들과 <목수들아>까지 모두 글래스 집안 남매들이 등장인물이라는데 <호밀밭> 말고는 저도 안 읽어봐서 자세히는 몰랐네요. <바나나피시>에서 시모어의 마지막 모습을 보셨겠군요, 레그나 님은 원서로 읽으신 겁니까?! 오-
  • 레그나 2015/09/29 19:35 #

    프래니와 주이도 글래스 집안 이야기였군요. 워낙 아끼는 이야기라 번역판도 원서도 다 가지고 있는데.. 먼저 접한게 원서라 더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이제와 고백하지만, 취한배님의 리뷰를 보고 만난 좋은 책들이 정말 많았어요.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 취한배 2015/09/29 22:14 #

    글래스 집안을 이미 접하셨으니 <프래니와 주이> 저보다 더 재밌게 읽으실 것 같아요. 샐린저를 원서로- 멋집니다.
    '고백'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니나 다를까 레그나 님의 <9월의 독서>를 보고 @@이랬답니다, 좋아서.ㅎㅎ
  • 다락방 2015/09/29 10:19 # 삭제 답글

    저는 오래전에 샐린저 책을 다 읽긴 했는데 하나도 기억 안난다는 게 함정!! 그래서 이거 개정판으로 다시 읽어보려고 가지고있던 책 방출했어요. 하하하하하

    Ps 는 정말 좋네요. 전 저런 구절이 좋아요. 뭐랄까, 별 거 아닌듯 하지만 실상은 전부라는 느낌을 주는 문장 말예요.
  • 취한배 2015/09/29 16:19 #

    샐린저를 다 읽으셨군요! <프래니와 주이>를 읽고 나니 글래스 가족을 다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저도 들었어요. 측근님도 어서 개정판으로 다시 영접하시길. (번역 좋았어요)
    그죠,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홀로 잘 서는 저런 구절이 저도 참 좋은 겁니다. 크.
  • 달을향한사다리 2015/10/03 22:46 # 답글

    저 이 책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나요ㅠ 기억나는 건, 프래니가 쇼파에 하냥 누워만 있던 게 부러웠던 것 뿐....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봤나봐요 ㅋㅋㅋ
  • 취한배 2015/10/04 00:09 #

    맞아요. 프래니가 정신줄 놓고 소파에 누워있었죠. 읽고 잊어주기를 바라는 보르헤스도 있었잖아요? 사다리 님 다시 읽으라고 새로 나왔나봐요, 샐린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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