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의 의식 Smoking

제노의 의식 - 8점
이탈로 스베보 지음, 이진희 옮김/느낌이있는책

 

의식(儀式)이 아니고 의식(意識, coscienza)이다. 자신에 대한 세밀한 관찰, 고해성사, 고백, 더 나아가 정신분석. 상담하던 의사의 권고에 따라 제노가 쓴 일종의 자서전으로, 엉뚱하고 우유부단하고 다소 이기적이며 건강염려증을 앓는 한 남자의 삶이 들어있다.


차례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한 인생은 이렇다. <담배는 숭고하다>에서 잘 소개해준 바 있는 흡연, 아버지의 죽음, 결혼, 아내와 연인, 사업, 정신분석일지. ‘의식’을 탐험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제임스 조이스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율리시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현저하게! 짧다는 점(558쪽)이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이탈로 스베보와 친분이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가 인정하여 독려했고 출판에 도움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1913년 세기의 여름>에서 본 이탈로 스베보는 제임스 조이스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스베보(1861~1928)가 조이스(1882~1941)보다 20여 년 연상이었다는 점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제노의 의식>에서 언급된 제노의 1913년은 어땠을까.
 

어떤 날짜들은 숫자적으로 특이한 조합을 이루며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 ‘1899년 9월 9일.’ 의미심장하다. 그렇지 않은가? 새로운 세기는 나에게 다소 이질적인 음악적 선율을 불러일으켰다. ‘1901년 1월 1일.’ 이러한 날짜가 자주 찾아오기만 한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13년은 나에게 휴식 기간이었다. 이 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요컨대 13월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러나 마지막 담배에 의미를 부여할 날짜를 찾기 위해 너무 심하게 조화를 찾을 필요는 없다. (43-44)


끊임없이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무렵이고 여전히 금연을 결심할 적합한 날짜를 찾고 있던 즈음이었을 터다. ‘사실 나는 너무 바빠서 다른 것들을 그리워할 틈이 없었다.’(52)고 하는 제노가 ‘휴식 기간’이었다고 1913년을 콕 집어 말한 건 예의 그 ‘폭풍’ 전야를 감지했기 때문이었을까. 전쟁의 냄새가 스멀스멀 끼어드는 1915, 16년 정신분석 일지를 마지막으로 소설-자서전은 끝을 맺는다.


상담의 단초였던 흡연 에피소드로부터 시작해, 가장 크고 깊은 고통이었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결혼과 사랑과 불륜과 일(사업)을 서술해나가는 한 남자라는 측면에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떠올리기도 했다. 스토너보다 40여 년 앞선 제노 또한 문학사에서 획을 그은 한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글쓰기가 자기 치유의 한 방식이라고 했을 때에 가장 잘 들어맞는 본보기라고 할까. 오해받았던 일들, 실수, 죄책감, 더 나아가 자기변명 등을 여지없이 털어놓음으로써 문학인은 어쩌면 심리적으로 가장 건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이 작품 이후 제노-스베보는 (흡연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정화되었을 것이며 튼튼한 신경을 유지했을 것이다. 상상으로 인한 질병이나 실제의 질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하지 않고, 자동차사고로 타계한 점이 더할 나위 없이 이 작품의 저자답다는 감상도 덧붙인다.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냥 끝. 오랜만에 독후감을 쓰다 보니 어떻게 쓰는 건지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수다쟁이 제노의 고백에 기가 소진되었거나, 무엇보다 치유로써의 글쓰기-고백에 있어 나는 아주 젬병인 듯도 하다.


삶은 정말 질병과 약간 닮아 있다. 진행될수록 위기와 파괴를 동반하며, 날마다 진보와 후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병들과는 다르게 삶은 언제나 치명적이다. 견뎌낼 만한 치료법이 없다. 우리는 몸이 가진 결함을 상처라고 믿으며, 중단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치료가 끝난 순간, 우리는 질식으로 죽을 수도 있다. (556)






덧글

  • 2015/09/15 06:04 # 삭제 답글

    빨대가 마음이 아프네요. ㅠㅠ 아직도 턱이 아프신겁니까? ㅠㅠ
    전 치유라기보단 쓰면서 해결책을 찾아간달까.. 식욕이 없단 글 쓰고 난 후 폭풍식욕 되찾은? ㅋㅋㅋ 상처를 치료하니 질식해서 죽는다라니, 뭔가 뜨끔. 본질에 충실해야겠어요.
    어쩐지 담배사진이 어울리는 책이로군요.
  • 취한배 2015/09/16 01:35 #

    잉잉. 많이 아프다가 조금 아프다가 하는데요, 요즘은 턱 자체보다 왼쪽 귀까지 언짢음요.ㅜㅜ 예리하신 포 님. (저건 소주;)
    공표(?)해버리고 나면 당장 해결(?)되는 포 님의 탄력성이 저는 참 좋아요. 그 기 저한테도 좀...ㅎㅎ
    끽연가가 어쩌면 경전으로 삼아야할지도 모를 책이거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좋아지네요.^^
  • 다락방 2015/09/16 11:27 # 삭제 답글

    어제 측근님의 이 글을 읽고 오늘 아침까지 자꾸만 '치유로써의 글쓰기' 생각이 났어요. 그리고 저는 확실히 치유로써의 글쓰기 쪽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감정이든 좋은 것이든 또 나쁜 것이든 일단 쓰면서 정리가 되기도 하고, 쓰고나서 마음이 좀 나아지는 것 같거든요. 음..저는 확실히 '치유로써의' 글쓰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제 글은 다분히 고백성인듯도 하고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 취한배 2015/09/17 01:31 #

    다락방 님 글이야, 전 진작부터 그런 줄 알았는걸요. 다락방 님 자신도 치유하지만 읽는 이도 공감하게 되는 글발. 책 얘기를 하는 것 또한 결국 자기 얘기를 하는 거라고 누군가(게코스키?) 말한 적 있지요. 다락방 님은 고백-글쓰기-치유의 마스터이심.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만큼 능률이 좋은 게 없다잖아요. 혹시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실 걸요?ㅎㅎ 가을 잘 보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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