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여름 NoSmoking

1913년 세기의 여름 - 10점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문학동네


전대미문의 폭풍(제1차 세계대전) 전야, 20세기의 여름이자 신경쇠약의 해 1913년이다. 불멸의 이름들이 제각각 튀어나오며 씨줄과 날줄이 된다. 넓이(공시)를 이루는 와중에 깊이(통시)는 가끔 한 번씩. 지능적으로, 짧게, 매력적으로. 일 년이다. 예술계 굵직한 획들과 사조와 사건과 이러저러한 만남과 사랑과 작품들에 현기증이 일 정도다. 어이 1913년만 그랬겠는가. 1912년은? 1914년은? 또 지금은.


1913년이 이랬기에 2015년이 이렇다. 결혼에 대해 망설임에 망설임을 거듭하는 카프카나 프로이트와 결별하는 융이나 프로이트와 거의 같은 작업을 문학으로 이뤄낸 슈니츨러나 알마 말러에게 집착하는 에곤 실레나 방음이 된 방에서 집요하게 과거를 추적하는 프루스트가 없었다면 아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했다면 현재는 또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913년의 한 장면 한 순간에서 자유로운 현재는 없다.


내가 어제 받은 소포에는 이탈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이 들어있는데, 이탈로 스베보는 1913년 11월 트리에스테에서 제임스 조이스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2010년에 나왔고 2015년에 읽은 소설 <화가, 혁명가, 그리고 요리사>에서 잘 그려 보여주는 트로츠키 암살자 라몬 메르카데르가 1913년 2월에 태어났다. 며칠 전 <생전 유고>로 만났던 로베르트 무질은 거의 1913년의 대명사격으로 신경쇠약을 겪으며 <특성 없는 남자>를 집필하고 있다.


기타등등, 기타등등. 2013년에 읽었어야 할 100년 전 일 년을 이제야 만나고 살짝 말문이 막혔다. 이런 글쓰기도 있구나. ‘넓지만 얕다’가 아니라 ‘넓고 얕다’라고 쓴다. 좋은 의미의 두 형용사이고 적절한 조합이다. 넓고 깊으면... 힘들잖아. 충분히 넓고 충분히 얕은 매력의 책. 깊이는 각자 알아서 파 볼 일이다. 예컨대 <특성 없는 남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율리시스> 같은 게 좋겠지;


기지가 넘치는 배치와 문장들 중 특별히 더 자주 언급되었던 장면에서 발췌문을 고른다. ‘함께 거리를 거닐지 않을 때는 서로를 향해 불타는 고백을 책으로 찍어냈’던(151) 엘제 라스커슐러와 고트프리트 벤. 베를린의 전 예술계가 지켜보게 된 두 시인의 공개적인 사랑 이야기가 참 좋았다.


벤과 라스커슐러는 이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두 마리 맹수처럼 서로 지켜보다가 주위를 맴돌았고, 나중에는 몇 주 동안이나 밤마다 새로 지은 베를린 서부 지역의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면서 상대방의 시들을 암송하며 배고픔을 채웠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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