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야상곡 Smoking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문학동네



 


두 번째 만남이다. 첫 만남은 13년 전이었다고 낡은 프랑스어본에 파란색 Bic 볼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타부키가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표정 많은 얼굴과 제스처에 아직 생기를 갖고 있던 때였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그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이탈리아어 억양이 섞인, 그이의 차분하고 겸손한 프랑스어는 듣기 좋았다. 이별과 여행과 생활과 노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13년이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타부키보다 나를 더 많이 읽는 것 같다. 세월, 이동, 변화. 준거는 <Nocturne indien> 혹은 <인도 야상곡>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들을 한참 헤매다가 어느 길 끝에서 불쑥 바다를 마주치는 꿈(내 꿈!)을 가장 좋아한다고 쓴 적 있다. (타부키+페소아) 그런데 어쩌면 그 꿈이 내 꿈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소름 돋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아주 기분 좋은 때, 그러니까 꿈속에서 내 의지가 발현되는 그런 상태에서 내가 곧잘 유도하는, 몇 년째 나만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꿈-기억이 아닐 수도 있었음을 준거가 말해주었다. 내! 골목-바다 꿈이 타부키를 읽기 전부터 내 것이었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음에야,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83).


“어느 날 필라델피아의 한 거리를 걷고 있었죠. 굉장히 추웠어요. (…) 거대한 길들을 가로질러 길고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어요. 단 한 줄기 햇살만이 짙은 안개를 꿰뚫고 간신히 그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내가 잘 아는 길이었어요. 매일같이 편지를 배달했거든요. 자동차 정비공장 벽으로 이어지는 막다른 길이었어요. 근데 말입니다. 그날 제가 무얼 보았는지 아십니까? 한번 알아맞혀보세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알아맞혀봐요.”
“항복하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요.”
“바다였습니다.” (87)


내 최고의 꿈을 빼앗고, 준거는 또 무엇을 했을까. 이름 하나를 찾아주었다. 불면증을 겪는 사람이 하는 위대한 일에 관한 멋진 표현, ‘밤이 있게 한다’는 문장의 주인. (‘밤’ 포스팅) 모리스 블랑쇼였다. 타부키가 제사로 썼던 이 말이 내 속에서 주인도 없이 떠돌고 있었다니. ‘어느 시인의 말인지 (혹은 그냥 내 말인지) 모르겠는데’를 부연했던 내가 그나마 자랑스럽다. (내가 작가였다면) ‘나 자신도 놀랐다’는 야릇한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될 터; 더구나 원문으로부터 옮긴 문장이 내 기억과는 꽤 다르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은 많든 적든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밤을 존재하게 한다. -모리스 블랑쇼 (9, 제사)


이탈리아어로는 어떻게 옮겨졌는지 모르겠지만 블랑쇼의 원문이 프랑스어이니 의견을 붙여도 될 것 같은데, ‘apparaissent (…) coupables’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좀 아닌 것 같다. coupable은 ‘잘못을 저지른, 유죄의, 범인’ 등의 의미이고, 본인 스스로가 느끼는 죄책감하고는 거리가 있다. 그들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죄가 있어 보인다, 그들의 잘못 또는 책임인 것 같다, 쪽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즉, 밤이 존재하는 건 불면하는 자들의 소행이라는 의미. (졸역)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다소간의 혐의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무엇을 하기에? 그들은 밤이 존재하게 한다.’


두 번의 만남. 13년의 간격. 구체적인 내용은 낯설지라도 타부키의 여러 겹 중 몇은 내 속에 내려 앉아 익숙한 무엇이 이미 되어 있었다. <인도 야상곡>은 준거가 되는 동시에 <Nocturne indien> 없이는 또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었음은 참 이상한 물고물림이다. 인도의 십이야(十二夜), 타부키의 프레임 안과 밖의 이야기처럼.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를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를 읽는 것처럼. 내가 나를 찾는 것처럼. 과거, 기억, 향수, 지금. 문학이 하는 일은 그렇게 슬프면서 아름답다. 13년과 내가 있다. 밤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사람은 그렇게 집요하게 당신을 찾아다니는 건데요?”
“누가 압니까. 참 어려운 얘기지요. 그걸 쓰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어떤 과거, 뭔가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나봅니다. 옛날에 잃어버린 어떤 것을 움켜잡고 싶은 거겠지요. 어쨌든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있어요. 말하자면, 마치 자기 자신을 찾는 것처럼 나를 찾고 있는 겁니다. 책들을 보면 그런 일은 숱하게 일어나지요. 그게 문학입니다.” (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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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9/04 14: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5/09/05 00:3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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