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유고 NoSmoking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로베르트 무질 지음, 신지영 옮김/워크룸프레스(Workroom)
 

혹독한 시대였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로 나치시대를 겪는 것은. 로베르트 무질의 생(1880-1942)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일생(1881-1942)과 거의 겹친다. 이들이 서로 스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을까. 조금 읽다 꽂아둔 플로리안 일리스『1913년 세기의 여름』(2013, 문학동네)을 정독해볼 일이다. 프랑스어 본!으로 시도했다가 일찌감치 포기한 『특성 없는 남자』의 무질을 워크룸프레스로 만났다.

내 마지막 말들은 내 손으로. ‘생전 유고’라는 형식이 내 ‘성격’과도 맞아 기대가 컸었나보다. 이야기와 에세이가 섞여 있고 이야기에 비해 에세이(그리고 연설문)에 이상하게 매력을 못 느끼겠다. 첫 장(章) ‘그림들’의 아주 짧은 이야기들로부터 어떤 수의 제곱수 행렬 마냥 진을 치는 내 포스트잇. 다시 말해 강렬했던 ‘그림들’에서 점점 지지부진해지는 느낌. 마지막 말들뿐 아니라 마지막 연설까지도 이 작은 책에 갇혔는데, 무질을 제대로 만나려면 진정 『특성 없는 남자』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 와중 ‘그림들’ 중에서도 두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밝은 귀」는 참 좋았다.

나는 네가 잠옷을 입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모든 것이 다 끝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다시 수백 개의 작은 행동들이 있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서두르고 있음을 안다. 분명 이 모든 것은 그러니까 꼭 필요한 일들이고 너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속한 일들이리라. 동물들의 말 없는 거동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는 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수를 써서 어떤 것 속으로 폭넓게 퍼져 있고 그곳에서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연히 나는 그것을 느낀다. 열이 있고 너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53,「밝은 귀」)


시의성이 문제되지 않거나 아예 시대를 초월하는 것은 정녕 이야기, 인간 감정들의 어떤 원형들일 것이다. ‘세계문학은 수백만의 영혼들이 고상함, 분노, 자부심, 사랑, 조소, 질투심, 품위와 비열함으로 치장되는 거대한 창고’(150)이기에. 소설가 무질, ‘미완’이라는, 우리 삶과도 닮은, 이야기, 작품, 예술을 만나기 위한 워밍업을 ‘생전 유고’로 하는 일. 우리 후세들의 특권이다. 숙제가 좀 길고 까다로운 게 문제일지는 모르겠다. 내 프랑스어 본 『특성 없는 남자』가 이미 ‘각인하는 힘을 상실’(90)하여 내 방의 벽 마냥 ‘어떤 배역을 할 능력을 잃은’(90) 건 또 아닐지 신경 써 눈 맞춰봤다.


실없군. 우리 언제 만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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