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고, 배반 당해본 이를 위해-심연으로부터 NoSmoking

심연으로부터 - 10점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문학동네

 

뒤편의 앙드레 지드 회고록과 독후감까지 읽지도 않았다. 나는 배반당한 마음, 그것도 유미주의자 와일드의 분노와 원한을 보고자 했으니까. 지극히 사적인 이런 편지가 와일드를 더 작게, 또는 우리와 더 닮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와일드를, 이 고고한 예술지상주의자를 이해하는 데 소중한 텍스트임에는 틀림없다. 사랑해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이 알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보통 책도 읽지 않더라능)

와일드는 처참한 감옥을 겪으면서 더 깊어진다. 이후의 작품이 없기 때문에 후세의 우리는 감옥 전의 와일드에게 깊이를 더하게 되는데, 나는 그게 정당하다고 본다. 흐르고 나면 시간은 거꾸로도 가고, 느리게, 혹은 빠르게도 진행되기 때문이다. 나는 <심연으로부터>로 인해 와일드가 더 좋아졌다. 그이의 작품은 분명 이보다 더 전에 쓰인 것들이지만 와일드는 자신이 살았을 법한 것을 글로 썼고 글로 쓸 수 없는 건 살아냈다. 지난 시간을 평평하게 한 줄로 요약하는 후세 독자들의 독재일 수도 있겠다만, 시간의 속성에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고통 속에 있는 영혼을 조롱하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이야.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삶은 추할 수밖에 없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묘하게 단순한 경제학적 논리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는 것만큼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야. 어떤 대상의 겉모습을 뚫고 들어가 연민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감정 말고 달리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192-193)


부제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는 이 편지글의 수신자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시구다. 와일드가 가혹하게 비판/비난하고 있는 사람의 시 구절을 나라면 부제로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참- 팔기에 좋은 문구이기는 하다. 동성애를 먼저 언급하는 모양새를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 동성애가 소비사회의 아이템이 된 게 늘 찜찜하다.

나쓰메 소세키가 빚이 얼마라고 읊는 소설을 능가하는, ‘얼마 얼마’가 편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뒤늦은 그 계산은 너무나 이해가 되는 회한이자 연민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반론도 들어보고 싶은 더글러스, 속물적이고 사치스러운 애인. 참으로 얄궂지만, 더 사랑하는 쪽이 돈을 더 많이 쓰게 되지 않던가.


당신은 사람의 감정을 거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우린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의 감정들에도 비용을 지불해야만 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 감정들을 더 고귀하게 만드는 거야. (214-215)


젊고 염치가 없는 상대이고 그 상대는 어쩌면 나를 벌거벗겨 드러내게 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와일드의 원한과 분노를 읽으면서 내가 치유되었다. 오늘 본 뉴스에 의하면 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어쩌다보니 남자일 수도, 또는 여자일 수도 있는 경험 안 해보았는지. 그렇다면 당신이야말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일 것이다.

‘내가 누구를 (남자든 여자든) 사랑하는 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성적소수자 퍼레이드에서 볼 수 있는 문구. 한 마디로 모든 사랑은 존중받아야 한다. 와일드는 자신의 끔찍했던 연애와 추한 연루를 적어갈 뿐 성적소수자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랑은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를 앞세워 얘기하지 말라. 이건 그냥 사랑과 환멸과 고통의 이야기이다.


내가 비록 불완전하고 결함이 많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내게서 배울 게 많을 거야. 당신은 삶의 쾌락과 예술의 기쁨을 배우기 위해 나에게 왔지. 어쩌면 난 당신에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고통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인지도 몰라. (239)


 

P.S.****


이제 그를 향한 경멸과 오만한 관대함, 그리고 경멸보다 훨씬 더 모욕적인 연민만을 느끼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때인 것이다. (296, 앙드레 지드,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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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5/26 07:24 # 삭제 답글

    어쩐지 이 글을 읽고 배님을 안아주고 싶어졌는데요, 그러다가 허공을 안는 제 팔을 발견하곤 혼자 머쓱해졌네요.
    오스카 와일드는 저도 정말 좋아하는데 역시나 안아줄 수 없어서 안타깝네요.
    가상의 Cuddle time 혼자 한 번 가져봅니다.
  • 취한배 2015/05/26 10:58 #

    어- 지금 보니 뭔 리뷰를 이따위로 썼나 싶네요?ㅋㅋㅋㅋ 저까지 원한에 가득 차 있어...
    안아주쎄염.ㅎㅎㅎ 가상의 포옹 콜! 포 님, 허공이 아니라 그 팔로 스스로를 안는 것도 ‘자기 달래기’ 방법으로 좋대요. 김형경 심리에세이에서 읽은 것 같아요. 헤헤+땡스-
  • 달을향한사다리 2015/05/29 18:00 # 답글

    좀 뜬금없을 수 있는 얘기지만, 저도 사랑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근데 책을 열심히 읽는 한 그렇게 못 되겠죠...
  • 취한배 2015/05/29 23:53 #

    흙. 사다리 님도 좋이 알고 계시죠. 이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용당하는 게 떳떳하다는 거요.ㅜㅜ ‘한 사람을 바꿀 수 없어서 / 나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이문재) 왠지 이 문장이 떠오릅니다. 와일드나 이문재나 예술로 세상을 바꾸고 있음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저 상대방이 뉘우치거나 사과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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