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당한 세상-시칠리아에서의 대화 Smoking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 10점
엘리오 비토리니 지음, 김운찬 옮김/민음사


그해 겨울, 나는 추상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떤 분노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영웅적이지도 않고 생생하지도 않은, 추상적인 분노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상실된 인류에 대한 분노였다. 오래전부터 그랬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9)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첫 문장에서부터 반했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반해 있다. 단문들과, 어떤 리듬감을 보여주는 반복과, 꿈같은 기억과, 부조리극 대사 같기도 한, 일견 엉뚱한 대화들이 이상한 울림을 남긴다. 파시스트의 검열을 피하려고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초현실주의적인 서술인데, 아픔은 사실주의적인 실재감을 갖는다. 1930년대 말에 쓰인 작품임을 염두에 두면 저 ‘추상적인 분노’와 ‘상실된 인류’가 어떤 의미일지 벌써 성큼 다가온다. 또 다른 표현으로 숱하게 등장하는 ‘모욕당한 세상’도 그러하다.


‘1936년에 터진 스페인 내전이 동기를 제공’한(255) 작품. 당시 비토리니 자신도 스페인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니, 어쩌면 <카탈로니아 찬가>를 경험하고 있었을 조지 오웰을 만날 수도 있었겠다. 실제로는 스페인으로 가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머물며 1938년부터 잡지에 연재했던 게 이 책이다. 전체주의 문화정책의 그물을 피해가고자한 노력으로, 결국 이루어진 시적인 문체와 초현실적인 서술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건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날개 접힌 나비를 보고 감탄하는 안타까운 일일까.


“세상은 크고 아름답지만, 많은 모욕을 당했어요. 모두들 각자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모욕당한 세상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세상은 계속해서 모욕을 당하고 있지요.” (184)


때로는 이렇게 공공연하기도 한데 작품이 계속 연재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기도 하다. 추상적이어서 검열을 피했다면, 추상적이어서 그대로 우리 이야기도 된다. 모욕당하는 세상을 매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이다. 시칠리아는 여기다. 35년 전 광주, 1년 전 세월호, 24년 전 유서대필 ‘조작’ 사건, 숨기려고만 하지 책임자 그 누구도 실상을 드러내고 사과하지 않는다. 진상규명과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도달하지 않거나 도달하여도 묵묵부답이다. 그렇게 계속 모욕당한다.


모욕당한 세상 때문에 괴로워하고 좀 울어도 좋으리라. 그 울음은 잊지 않음이고 ‘기억’이고 역사다. 추상적인 분노로 시작하여 하염없는 울음-기억으로 마무리되는 비토리니를 나는 이렇게 읽었다. 큰 작품을 작게 만들거나 열린 작품을 닫아버리는 우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히 내게,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는 아름답고 옳고 감동적이다.


“왜 울어요?” 그들은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해 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실제로 나는 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울고 있는 모습으로 비쳤던 것이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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