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이야기 Smoking

잔혹한 이야기 - 8점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물레


19세기 묘한 매력의 SF, 『미래의 이브』(2012, 시공사)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으로 빌리에 드 릴아당을 다시 펼쳤다. 봄날이 밝고 온화하니 ‘잔혹한’ 어둠이 좀 필요했다. 그러나 단편집 『잔혹한 이야기』는 잔혹하다기보다 신랄하다. 5월 햇볕 아래, 정독하지 않고 띄엄띄엄 읽긴 했으나 문학과 글쟁이에 대한 신랄한 풍자, 자본과 죽음에 대한 조롱, 사랑의 가벼움과 덧없음 등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길이가 제각각인 27편 중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치자면 보들레르의 시구가 제사로 쓰인 「혼동하는 만큼!」인 듯하다. 보들레르의 권주가「취하시오」중 ‘당신이 원하는 대로!’와 상응하도록 제목을 달지 않았나 싶은데, 다섯 쪽밖에 되지 않는 길이에, 그것도 반으로 딱 나누어 맞대면 서로 거울 이미지가 될 듯한 야릇한 분위기가 좋다. ‘잔뜩 흐린 11월의 어느 날 아침,’(152)으로 시작하는 것도.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머릿속에 상념들로 가득한 채 거리를 걷다가 ‘나’가 불쑥 마주하게 되는 네모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실내도 사람들도 온통 납빛. 시체공치소였다. ‘그들의 눈은 아무런 생각 없이 텅 비어 있었고, 얼굴빛은 모두들 납빛과도 같은 오늘의 하늘빛을 띠고 있었다.’(153) 문득 ‘나’는 새 사업 파트너와 어제 했던 약속이 떠올라 마차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간다. 네모난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납빛의 창백한 공간. ‘그들의 얼굴빛은 모두들 납빛과도 같은 오늘의 하늘빛을 띠고 있었으며, 시선은 아무런 생각도 담고 있지 않았다.’(155)


‘두 번째로 본 광경이 첫 번째보다 한층 더 불길한 징조를 띠고 있어…’ 라고 할 뿐 ‘나’는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열었던 유리문을 조용히 닫고 집으로 돌아’온다. 꿈같은 분위기로 아주 짧고 강한 현실 비판까지 담고 있어 마음에 들었다. 죽음의 납빛과 아등바등 조금이라도 남을 등쳐 돈을 벌려는 사업가들의 납빛을 대칭으로 놓아 긴 말이 필요 없어진다. 다섯 쪽이면 충분하다. 제사가 제 몫을 톡톡히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나란히 꽂힌 이유.  내가 좋아하는 『거꾸로』(2007, 문학과지성사)의 위스망스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문우이기 때문이다. 책들의 자리. 도서관의 서지분류와 다른, 여러 ‘내 마음대로’들 중 하나인데 작가들 간의 친밀함, 우정 또는 사랑이 곁을 정한다. ‘1889년 8월 18일, 빌리에 드 릴아당은 말라르메와 위스망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도암으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책날개 작가소개) 그렇다면 나의 말라르메는...? 음. 좋은 질문이다.



덧글

  • 2015/05/06 06:44 # 삭제 답글

    이것도 역시 ebook은 없군요.
    안그래도 만질 수 없어 짜증나는 이북인데, 컨텐츠가 빈약해서 점점 빈정상합니다. 하루 종일 걸려 2권 채우고는 관뒀네요. 그 중 '지푸라기 여자'도 넣었어요!!

    여튼.. p.p 말로는 프랑스산 담배가 더 기름지고 맛있다던데 정말 그런가요?
    담배의 유혹은 여전 여전..

    p.p과 뮈게 이야기를 하다가 르펜(아빠버젼)이 노동절에 뮈게 꽂고 나와서 생난리 치는 사진과 영상 보면서 한참을 깔깔거렸네요.
  • 취한배 2015/05/07 00:26 #

    출간된 지 꽤 된 책이라 더 그럴 듯요, 빈정상하신; 포 님께 ‘현대판! 잔혹한 이야기’를 대신 추천 드리자면 루스 렌델(렌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좋아하실 것 같아요. (이미 보셨으려나;) <지푸라기 여자>말고 나머지 한 권은 뭐예욤?ㅎㅎ

    ppㅋㅋㅋㅋ 실존인물이었군요!! 프랑스 산 담배, 딱 떠오르는 걸로 ‘지탄’(갱스부르의 담배)는 ‘기름지고 맛있다’에서 멀지만 ‘골루아즈’는 좀 맛있었던 것 같아요. 마는 담배는 ‘드럼’을 피웠는데 프랑스 산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pp이 끽연가라면, 즐- 간접흡연!ㅋㅋ

    르펜-아빠버전은 진짜 무슨 깡패 같지요. 생난리.ㅋㅋㅋㅋ근데 사실 딸버전이 저는 더 무섭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보수적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pp과는 에스파뇰로 대화해요? 아, 좋아라.ㅎㅎㅎㅎ
  • 2015/05/07 02:2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취한배 2015/05/07 15:53 #

    1. 오. 염장일 것에 완전 동의...하긴 합니다만, 후기 꼭 남겨주세요. 궁금했던 책이긴 했어요. 희희
    2. 넹. 못 들었슴미당- ㅋㅋㅋㅋ
    3. 크- 그 유명한 엘 파이스! 멋져멋져요@.@ 우리에 비하면 정말 ‘옆 동네’ 언어라 억울함이 이해됨요. -_-+ 하지만 이미 영어라는 베이스도 갖고 계시고, 제 느낌상으로는 *님 언어감각이 훌륭하신 듯요. 시엠프레 케 테 프레군토 케 콴도 코모 이 돈데 투 시엠프레 메 레스폰데스... ㅎㅎㅎㅎ 노래가사나 시 외우는 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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