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더링 Smoking

개더링 - 10점
앤 엔라이트 지음, 민승남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나는 고속도로로 들어서며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잃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너무도 엄청난 에너지 낭비인 듯한데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다. (…) 우리들 각자는 누군가를 (그 사람이 죽을 것임에도)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도 계속 사랑한다. 거기에 논리나 이성은 작용하지 않는다. (37)


상상과 현실이 같은 무게와 질감으로 교차하면서 아프고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문장마다 벅차다. 기억과 사랑과 욕망과 성찰의 글쓰기, 매혹의 앤 엔라이트를 만났다.


  



닮았나? 랜덤하우스 <개더링>과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앤 엔라이트(1962~)와 존 반빌(1945~). 아일랜드 태생. (맨)부커상 수상작. 누군가를 잃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회상과 기억. 바다와 술. 아름다움-아름다움. 사실은 읽은 지 오래되어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를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는데 <개더링> 198쪽 한 문단이 퍼뜩 <신들은...>으로 나를 데려갔다. 바람에 관련된 표현이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신들은...>에서 아마 유일하게 내 뇌에 저장되어 있던 부분이었던 듯.


허벅지를 붙잡힌다. 정체 모를 느낌에 허벅지를 붙잡힌다. 모호한 바람. 그것이 나를 붙잡고 내 옷과 피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 온몸의 털을 들어 올린다. 내 입술을 스친다. 그리고 가버린다. (<개더링> 198)


나는 혼자서 피어헤드 바로 가 술에 취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 바람이 불자 외투 자락이 나의 ‘어린 것들’처럼 다리에 휘감기며, 그들의 아버지에게 술집에 가지 말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존 반빌,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251)


아일랜드에서는 바람이 거셀까? 김영갑 작가가 제주도의 바람까지도 사진에 잡아냈듯 아일랜드 작가의 문장에도 바람을 잡아내는 어떤 기질이 있는 걸까? 저들이 술을 엄청나게 마셔대는 건 알고 있다. 프랭크 매코트의 회고록(<안젤라의 재>, <그렇군요>, 문학동네)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리시 펍’들. 태국 1박2일 트래킹 코스에서 술병이 나 하산 길에 온통 토악질을 해 내 마음을 안쓰럽게 했던 이도 다름 아닌 아일랜드 젊은이였다.

술이 흐르는 것 외에도 기질 상 아일랜드가 우리와 닮아 보이는 부분은 가족관계가 아닐까 싶다. 친밀하게 느낄 수 없는 근엄하고 무서운 아버지, 피임을 하지 않던 관습으로 젊은 시절 대부분을 임신과 출산으로 보내는, 억척스럽거나 희미해지는 어머니, 북적대는 형제자매들 간의 특별한 친밀함과 애증들. ‘아, 지긋지긋한 내 가족. 결코 사랑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내 가족.’ (319)

자신과 가장 가까워 거의 분신으로 여기던 리엄 오빠의 죽음을 접하고 베로니카의 글쓰기가 시작된다. 자신과 가족 삼대. 현재와 과거. 본 것과 들은 것, 기억, 상상, 유추, 서류로 남아 있는 기록들까지. 일종의 초현실적 가족사(史). 내 분신의 우울과 죽음의 이유, 또는 비밀이 어쩌면 그 안에 있을 터이기에. 비밀, 분노, 미움, 사랑, 슬픔, 섹스, 번식, 그리고 장례식. 가족이다. “엄마한테 해줄 말이 있어. 그 말은 ‘사랑’이야.”(316) 전화로 들려오는 어린 딸의 이런 목소리이기도 하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주머니에 꾹꾹 채워 넣는 돌멩이이기도 한 그것은.


호텔로 돌아가고픈 유혹이 너무도 강하지만 나는 억지로 출국장에 앉아서 체크인 카운터로 갈 때까지는 목적지를 정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집 말고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임을 안다. (318)



 

덧글

  • 다락방 2015/04/10 15:41 # 삭제 답글

    오, 측근님에겐 이 책이 별 다섯이네요? 저는 이 책 힘들더라고요. 책장이 너무 안넘어갔어요. 그래서 '맨부커상과 나는 안맞는구나' 했어요. 일전에 맨부커상 받은 작품 [영국 남자의 문제]였나, 그 책도 거의 멘붕 오는 상태로 읽었거든요.
    저는 왜 이 책 읽기를 힘들어했을까요? 갸웃.
  • 취한배 2015/04/11 04:16 #

    아, 그래서 이 책 다락방 표 페이퍼가 없었군요. 넹- 이분 글 아주 센 면이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워 저는 헉, 했어요. 물론 책장이 살짝 힘들게 넘어간 건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ADHD마냥 뒤죽박죽 산만한 듯하면서도 희한하게 절제되고 정제된 느낌? 정말, 생각해보니 저는 맨부커상과 잘 맞는 것 같아요.ㅎㅎ 다락방 님은 공쿠르 상 쪽인 걸로-?
  • 달을향한사다리 2015/04/10 17:57 # 답글

    아, 이거 작년 도서정가제 직전에 사서 쌓아놨는데, 어제 저녁에 문득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책 산 날 들고 오면서 앞 서너 페이지 읽었는데 느낌이 진짜 좋았던 기억이... 그러면서 아침에 들고 나온 건 다른 책이었어요ㅋㅋㅋㅋㅋ 그치만 오늘 들고 나온 책도 좋아요^^ 이 책은 꼭 다음에 읽어야겠어요~
  • 취한배 2015/04/11 04:18 #

    도서정가제+이사 가 겹쳐 책 구입 딜레마에 빠졌던 사다리 님이 떠오르네요.ㅎㅎ 그 와중에 사놓으셨다니 제가 다 뿌듯합니다. 술렁술렁 읽히지 않는 밀도 높은 글이라 좀 놀라웠고 좋았어요. 오늘 들고 나오신 책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사다리 님은 몰아서 리뷰를 올리시니 꼼짝없이 월말을 기다려야... 희희. 주말 (아마도 도서관?) 잘 보내세요!
  • 2015/04/10 21:26 # 삭제 답글

    첫 인용글 읽고 당장 이북 있나 달려가서 봤지만 역시나 없네요 털썩...... 문장이 진짜 아름답고 벅차는 동시에 위안이 되네요. 좋다..
    전 술은 도저히 안되겠고 오늘 금연 1일차 입니다. ^^ 하하하랗하라ㅏ 친구가 오며 면세점에서 사다준 담배가 아직 4갑이 남았는데요, 그거 보면서 언제라도 죽겠으면 다시 펴야지.. 라고 생각하며 끊어볼라구요. ㅎㅎ
  • 취한배 2015/04/11 04:21 #

    이크. 존 발리에 이어 또 포-약-올림-리뷰가 되어버링? 잉.
    금연 응원합니다. 저축해둔 기분의 든든한 4갑이군요.ㅋㅋ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별이 훨씬 쉽죠. 술이든 담배든 아마도 사람이든. 흡;; 스스로 배신자가 된 취한배가 포 님께 <개더링>의 한 문장을 더 드림. '술을 따르고 잔으로 손을 뻗는 사이 나는 모든 것이 후회스럽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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