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자스의 유령 Smoking

캔자스의 유령 - 10점
존 발리 지음, 안태민 옮김/불새
 

그래도 누군가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게 된다면, 우선 그자의 기억 큐브를 파괴하고, 다음으로 육체를 죽여, 자신이 증오하던 대상을 영원히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8, ‘캔자스의 유령’)


한 존재의 증거는 어쩌면 육체와 기억. 기술의 발달로 육체를 복제하여 영구히 살게 할 수 있다면 은행이라는 장치로 돈을 보관하듯 기억을 보관하는 설정이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거의 모든 소설의 발단이 되곤 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 컴퓨터가 완벽하다면, 아니 그것을 애초에 설계한 인간의 예지 능력이 완벽하다면 SF가 들어설 틈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도둑맞고 살해당한 주인공. 그간 보관되었던 기억을 새 육체에 이식받고 다시 살아나, 자신을 살해한 자를 찾는 이야기가 ‘캔자스의 유령’ 이다. 육체를 다시 만들고 ‘개조’하는 것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가벼움이 나는 참 좋다. 그에 따라, 미/추, 여자/남자 의 경계가 중력처럼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 가뿐함이. ‘밀당’ 없이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나누는 사랑 또한 무척 마음에 든다.

중앙 컴퓨터의 ‘인간적인’ 면에서 존 발리의 따뜻한 감성을 보았다. 인공지능을 거론할 때 늘 문제가 되는 ‘인간을 닮았음’이 섬뜩하지 않고 말 그대로 인간적이다.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 인간적 헛점 뿐 아니라 누군가를 배려하여 원칙을 어길 수 있는 인간적 선함까지 가진 컴퓨터. 단편집인줄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가 ‘캔자스의 유령’이 덜컥 끝나버리자 못내 아쉬웠는데 이어지는 작품들이 모두 보석 같았다. 

특히 ‘화성의 왕궁에서’ 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네덜란드 ‘마스원Mars One’의 화성 이주 계획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화성에 착륙한 탐사원들이 불의의 사고로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 70년대에 쓰인 소설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감탄스러운데 네덜란드의 저 벤처회사 젊은이들, 당연히 이 소설을 읽었으리라 여겨진다. 화성 이주 계획, 즉 다른 말로 화성 행 편도!비행이라니, 이런 SF가 아니었다면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로버트 하인라인, 황금가지)을 몇 번이나 읽다가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기대되는 성별 역할의 고루함 때문이었다. 먼 미래와 광활한 우주를 상상하면서도 끝내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현재보다 조금도 진보하지 않은 인간의식을 고수하는 SF에 나는 흥미를 못 느낀다. 현재의 ‘보수성’을 고발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ㆍ도덕적 ‘진화’까지도 믿는 듯 보이는 존 발리의 상상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불쑥 옷을 벗거나 섹스를 하는 장면도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하는 주체와 당하는 객체 또는 보는 이와 보이는 이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 피부색, 연령, 출신국 등의 차별이 없이 인류로서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고 생존하는 이야기. 과학적인 진보로 지구를 벗어난 스케일이라면 이 정도의 인간성 진보도 담보하리라는 건 내 바람과 생각이기도 하다. 불새출판사 존 발리 멋지다. 최고다.


“(…) 나는 어쩌면 아빠라는 존재가 난자의 수정 이상의 역할을 했었던 과거에, 그들이 엄마 이상으로 자녀를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 (111, ‘역행하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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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5/03/23 05:06 # 삭제 답글

    읽고 싶은 책은 ebook이 없네요. 정신차리고 스페인어나 공부하란 건지... ㅠㅠ
  • 취한배 2015/03/23 14:40 #

    ㅜㅜ 불새출판사의 열악한 형편이... 배달요금이 거의 책값이라 선뜻 보내드린다는 말씀도 못 드리겠고; 흙. 죄송함미다. 스페인어 열심히 공부하셔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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