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Smoking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오른쪽 주머니 를 읽었으니 왼쪽마저 읽는다. 오른쪽과 대동소이하다. 연재의 분량을 맞춰야하는 압박이 혹시나 있었는지, 영 다른 이야기 두 편이 한 꼭지에 함께 실린 경우도 있고 꼭 추리물이라고 할 수 없을 단편도 있는데 천편일률 24편보다는 들쑥날쑥한 그 점 또한 매력으로 여길 수 있을 듯하다. ((이하 스포.))


범죄물에 속하는 것 중에서도 차페크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애틋한 사랑이야기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짝사랑하는 소령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이 스파이인 척 징역마저 감수하는 ‘어린 백작 아가씨’ 편이다. ‘당신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숱한 잭 니콜슨들이 있는 반면 상대의 관심을 사려고 자작극으로 스스로 역적이 되려는 사람도 있을 터. 어쩌면- 관심병? 특정한 누군가를 목표로 한, 바로 그 관심병이 (짝)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이 모든 폭로, 환멸, 쓰디쓴 사실, 실망, 그리고 고통스러운 경험. 이것들은 기껏해야 진실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진실이란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것은 사랑과 긍지, 열정과 야망은 위대하고도 어리석은 것이고, 모든 희생자는 영웅이며, 사랑에 빠진 인간은 아름답고도 놀라운 존재라는 것이다. (105, ‘어린 백작 아가씨’)


‘하브레나의 판결’ 도 흥미롭다. 실제 범죄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날들에도 신문에는 범죄 기사가 실려야 팔리고 읽힌다. 하브레나는 이런 허위 사건 이야기를 만들어내 기자들에게 읊어주는 이야기꾼이다. 그가 지어내는 가짜 사건들은 기발하고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법률적 관점에서도 흠 잡을 데 없이 치밀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짜) 사건에 대해 법무부가 태클을 걸면서 하브레나의 집착이 펼쳐진다. 자기가 내린 판결의 정당성을 몸소 입증하려는 집요한 노력. 자기가 믿는 정의, 그리고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의 옳음을 위해 자신의 유죄 선고를 받아내려는 이 이상야릇한 상황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게 가장 매력적이었던 작품이라면 ‘고해’ 가 아닐까 싶은데, ‘고해’에는 정말 고해(했다는 사실)만 있다. 고해신부, 변호사, 의사에게 각각 고해한 한 남자, 아마도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 이 공통의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고해신부, 변호사, 의사가 화자들이다. 즉, 고해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람, 고객에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 범죄사실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 환자의 정보를 유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화하고 있는 중. 그러니 ‘너무나 섬뜩하고 역겹고 짐승 같은 짓’(170)은 우리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다. 허탈할까? 그게 매력적이었다. 그나마 우리야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서정적인 도둑’ 편을 읽을 수 있지만 당시 차페크의 짧은 이야기들을 연재물로 손꼽아 기다려 한 편씩 읽었던 독자라면 허탈감과 함께 살짝 약 오르지 않았을까 했다.


파격이나 뒤통수를 치게 하는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예스럽고 소박하고 어찌 보면 조금은 촌스러운 이야기들이 뭔가 가볍지만은 않은 여운을 준다. 곧 잡혀 자백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범인과, 용서할 줄 아는 피해자들의 인간적인 냄새. 결국은 양심과 휴머니즘. 그리고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로서 쓸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상념 또한 묵직하다. 살해당한 노파의 발에 한쪽만 신겨 있는 슬리퍼, 뒤꿈치가 꿰매어진 볼품없는 스타킹, 피 묻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생생히 볼 수 있는 사건현장에서 떠올리는 죽음의 대비. 무지막지하고 무자비하고 무의미하며 전체적인, 전쟁의 이름 없는 죽음에 대한 은근한 고발이 그렇다.


맹세코 정말 필요한 건 사람들-소년이나 여인, 어린아이도 예외는 아니다-로 하여금 군화 속의 발이라든가, 피에 젖은 한 움큼의 머리카락 같은 죽은 군인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239, ‘평범한 살인’)



 

덧글

  • ㅂ.ㄷ. 2015/02/22 20:43 # 삭제 답글

    왼쪽-오른쪽 주머니 이야기는 저도 지난달 구입해 쟁여두었습니다. 아담한 사이즈에서부터 어깨힘 들어가지 않은 그의 소설들을 연상케 하더라고요. 아, 저는 차페크의 철학 3부작 《호르두발》《유성》《평범한 인생》도 가지고 있다지요. (자랑자랑~)
  • 취한배 2015/02/22 23:23 #

    '어깨 힘 들어가지 않은'이 딱 맞아요! 모든 작품이 <도롱뇽과의 전쟁> 같을 수는 없겠지요? 철학 3부작, '별똥별'이 아니고 '유성'인 걸로 보아 리브로 판으로 갖고 계신가 봅니당. 으아- 자랑하실만해요;; 모비딕에서 <로봇>이 나오면 냉큼 사는 걸로 제가 맞대응하겠습니다.ㅋㅋ 연휴 잘 보내셨어요?
댓글 입력 영역


moon

CURRENT MOON

뉴스타파

알라딘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