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Smoking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8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대표작 『활자 잔혹극』(북스피어, 2011)도 건너뛰고 내가 처음 만난 루스 렌델(렌들)이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을 믿기(?) 때문이라고 할까. 이 단편집 첫 작품이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불과 17쪽밖에 되지 않는 초단편이다. 108분짜리 영화로 어떻게 만들었을지, 영화를 보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놓치고 말았는데, 영화정보의 줄거리를 보아하니 살이 아주 많이 붙었다. 렌델의 뼈대에 오종의 탐스러운 살. 비유가 좀 거시기-하지만 과연 ‘파격과 도발의 시네아스트’ 오종이 탐낼 만한 멋진 골격임에는 틀림없다. 두 커플, 오묘한 (성적) 취향, 살짝 뿌려놓은 복선, 서서히 고조되다가 쾅하는 충격. 이미지와 사운드 없이 글로만 전해줄 수 있는 생경한 장면을 마주칠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작품에서는 아래 발췌문. 적어도 두 번은 (혹시 번역이...? 하는 의문을 포함해서)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멋진 문장이었다. ((스포))


“오늘 멋져 보여.” 그가 말했다.
“너도.”
그는 투피스 차림이었다. 분홍색과 흰색 꽃무늬가 있는 감색 실크 소재였다. 치마는 무척 짧았고, 짙은 감색의 널찍한 페이턴트 벨트를 매서 재킷의 허리 부분이 잘록해 보였다. 긴 금발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화장을 짙게 했고, 이번에는 매니큐어까지 칠했다. 처음 했던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다. (12-13,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이어지는 10편의 작품들 모두 강렬한 장면을 적어도 하나씩 가지고 있어 지루할 틈 없이 순식간에 읽힌다. 옛사랑에 대한 비뚤어진 집착을 보여주는 「푸른 히야신스」는 단편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을 아주 잘 보여준다. 구구절절 언급되지 않으나 밑에 은근히 깔리는 지난 이야기에 대한 암시가 나는 참 좋았다. 「과수원 울타리」, 「늪지 저택, 펜 홀」은 어린아이의 시선에 갑자기 헉-하고 달려드는 죽음과 사형(私刑)이 충격적이다. 「뇌물과 부패」,「휘파람 부는 남자」는 매우 현재적이면서 빼어난 추리 범죄물. 11편 중 어쩌면 가장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 작품은 「헤어가 살던 집」인데, 살인이 일어났던 집에 이사한 부부가 그 범행을 똑같이 반복할 뻔한 이야기다. 「나팔꽃 시계」는 보수적인 노파가 저도 모르게 절도를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심리가 적나라하며, 동물 복장을 하고 쾌감을 즐기는 모자(母子) 이야기 「늑대 탈」은 이상하면서 음침하고 무서웠다. 「아버지의 날」은 아이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섬뜩한 끝맛을 안겨준다. 마지막 작품 「케판다로 가는 초록 길」은 슬쩍- 꿈같은 분위기로, 인기 없는 작가를 소재로 하는데 순서 상 끝에 오면서  묘한 기분으로 책을 덮게 한다.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게 나쁘지 않을 만큼.


그 잊을 수 없는 오후에 굳게 마음먹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아서의 책을 읽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책 얘기를 할 대상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비평가가 했던 말이 사실이고 그의 소설이 엉터리 영웅담과 거짓된 멋진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서에 대한 내 기억이 망가질 것 같아서였다. 어떤 글이든 그 글을 쓴 사람을 알면 느낌이 각별한 법이다. (233, 「케판다로 가는 초록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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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troller 2015/02/07 15:20 # 답글

    기다린 보람이 있으시네여..
  • 취한배 2015/02/07 22:08 #

    넴. 재미있었어요. 루스 렌들의 장편들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담.^^
  • 달을향한사다리 2015/02/16 17:05 # 답글

    오오오~ 이 책도 찜! 진짜 재밌을 거 같아요^^
  • 취한배 2015/02/18 04:46 #

    아... 이 책은 좀 세다는 주의말씀도 드립니다- (공포소설 잘 못 보시는) 사다리 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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