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NoSmoking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 8점
토머스 드 퀸시 지음, 유나영 옮김/워크룸프레스(Workroom)


‘취향’이라는 개인적이고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느낌의 단어가 한쪽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 묵직하고 고지식하고 회색 노인 같은 개념으로 ‘윤리’가 오리라. 유행하는 문장처럼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고 할 수는 있어도, 엄밀히 말해 어떤 취향도 윤리에서 자유롭기는 꽤 어렵다. 최대한 윤리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취향을 밝힐 수 있을 뿐. 그렇지 않은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최근 한 에피소드, ‘정치적으로 그릇됨이 없으며,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어떤 문화의 예의에도 어긋나지 않는 에피소드’는 1분짜리 무음! 녹음을 들려준다. 내게는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의 역설보다 선명한 의사표현이며 예술행위, 과장하자면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만큼이나 파격적인 1분이었다. 일상에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럴진대, 어찌 보면 일상생활의 ‘과외’라고도 할 수 있을 취향에 관해서는 더 그렇지 않겠나.

19세기 매문가 토머스 드 퀸시가 그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라니. 드 퀸시는 윤리라는 이 회색 노인네에게 일찌감치 큰 한 몫을 떼어주고 마음 편히 취향으로  넘어간다. 임박한 살인이 아닐 경우, 즉 사태가 이미 벌어지고 난 뒤에는 윤리를 내려놓고 살인을 예술작품처럼 감상해보자는 것. 향유되고 감정(鑑定)되는 살인. ‘애호가(dilettante)’로서, ‘감정가(connoisseur)’로서 평가하는 살인.


조각상, 회화, 오라토리오, 음각 및 양각 세공 등이 그렇듯 살인에도 그 가치의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누가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거나 너무 공공연히 떠든다는 이유로 화를 낼 수는 있지만 (…), 어떤 경우에도 생각하는 것만은 허락되어야 합니다. (90)


18세기 영국 귀족들의 비밀 사교 클럽 같은 모임이 19세기까지도 계속 유행했던 모양으로, 드 퀸시가 강연을 했던 곳도 이런 특정한 취향의 신사 클럽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자살클럽>을 보면 이런 회합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다. 자살을 완벽하게 ‘도와주는’ 비밀 사교 모임. 스티븐슨이 드 퀸시보다 나중 사람임에도 더 예스럽게 느껴지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드 퀸시의 글이 그만큼 더 현재적이라 할 수 있을는지?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자, ‘예술’로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그것의 평가 기준이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과연 그렇다. 단순히(?) 피비린내가 풍기는 살인(예술)을 무조건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양식 있는 예술 애호가’가 아니다. 살해 시간과 장소, 피해자의 조건이 있어, ‘현역 예술가의 예리한 감각은 주로 밤 시간과 홀로 있는 공간에’(69) 끌리며, 피해자는 선량해야 하고 공인(公人)이어서는 안 되며 건강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예술 분과로서 살인의 최종 목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목표 -즉 “연민과 공포로써 마음을 정화하는 것” -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66)


드 퀸시에게 있어서 이런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은 동시대 최고 ‘예술가’가 존 윌리엄스다. 1811년 두 건의 일가족 살해범. ‘후기’에서 이 살인 장면을 멋들어지게(?) 기술하고 있는데 글쟁이로서의 면모가 그야말로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쩌면 이 후기를 쓰기 위해 앞의 강연문과 ‘이론’을 늘어놓은 게 아닌가 할 정도로.

216쪽


존 윌리엄스의 행각을 호흡과 시간조차 잊은 채 몰입하여 단숨에 읽어 내린 나는 곧장 드 퀸시의 ‘공범’이, 아니 ‘애호가’가 된다. 솔직히 말하자. ‘20세기 프랑스 지성을 사로잡은 자매 살인자와 끝나지 않는 텍스트의 변주’ <잔혹과 매혹>(레이첼 에드워즈, 이제이북스), ‘내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죽인’ <나, 피에르 리비에르>(미셸 푸코 외, 앨피), ‘일가족 살인 사건과 수사 과정을 다룬 진실한 기록’ <인 콜드 블러드>(트루먼 커포티, 시공사) 등 내 책꽂이를 대충 봐도 눈에 들어오는 애호가적 취미를. 그뿐인가, 토막 내고 자르고 써는 그 수많은 스릴러물들은?


살인자의 내면에는 분명 엄청난 격정 -질투, 야망, 복수, 증오- 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으며, 이는 그의 내면에 지옥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바로 그 지옥이다. (15)


드 퀸시가 여러 번 강조하여 얘기하듯 이 글과 강연은 예술을 ‘실천’하라는 종용이 아니라 ‘평가’하는 취향 고백이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 천국과 지옥이, 밝음과 어둠이,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실천과 평가가 있다. 어둠을 읽음으로써 밝음을 제대로 살(生) 수 있는지도. 호프만, 드 퀸시, 보들레르, 포, 보르헤스... 이 어두운 이름의 작가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실천’만 난무하는 더 이상한 곳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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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락방 2015/02/03 09:02 # 삭제 답글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은 바로 그 지옥이다' 가 위안을 주는 것 같아요, 측근님.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달까요.

    아니, 그나저나 올리신 책찾의 책은 제가 읽은 것도, 가진 것도 한 권도 없네요. 저 책장의 이름은 '다크블루' 입니까, 측근님? 혹은 '나를 봐줘'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마이클 볼튼의 노래중에, 그런 제목의 노래가 있어요. 'Hear me' 라고. 저 책장의 이름은 그렇게 붙여도 되겠어요.
  • 취한배 2015/02/03 12:15 #

    그죠. 모른 척 한다고 '지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스릴러물을 포함해 많은 소설들에서 살인에 이르게 되는 '엄청난 격정' 만큼 아리스토텔레스 적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도 없고요. 그래서 자꾸자꾸 찾아보게 되고 말이죵.
    '다크블루'라는 멋진 이름을 주시다니요. 그냥 '지옥'칸.ㅋㅋ 생각해보니 좀 정리한 다음에 찍을 걸... 싶네요. 임시로 대충 박아놓은 책장 꼬라지. (사실은 정리가 평생 임시) 다락방 님이 언급해주셨으니 오랜만에 마이클 볼튼 목소리 들으러 가야겠어요. Hear me라고요, 오케+땡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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