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쿠나The Lacuna Smoking

화가, 혁명가 그리고 요리사 - 10점
바버라 킹솔버 지음, 권경희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1916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멕시코에서 보냈으며 1940년 미국 애슈빌에 정착하여 작가로 글을 쓰다가 1951년 다시 멕시코 픽솔 섬으로 돌아간 사람. 30년대 멕시코와 40년대 미국을 그대로 겪고 코르테스 이전의 멕시코를 소재로 작품을 쓴 깡마르고 키 큰 남자 해리슨 윌리엄 셰퍼드다.

맬컴 라우리의 ‘영사’(<화산 아래서>, 문학과지성사, 2011)가 술에 취해 헤매고 다니던 배경이라는 기억밖에 없는 30년대 멕시코는 어떤 곳이었나. 오르티스 루비오 대통령이 카예스의 과도한 참견과 암살시도로 물러나고 로드리게스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가 같은 카예스 편이었던 카르데나스가 후임 대통령이 되는 일련의 정치판이 펼쳐졌던 시기. 옥타비오 파스가 첫 시집을 내었을 때이며 어린 푸엔테스는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아마도 외국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가 한창 활동했으며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트로츠키가 몸을 옮겨온 장소와 시기이기도 하다.



디에고 리베라 <멕시코의 역사> (대통령 궁 벽화 중 1935-39년 작)
출처 www.panoramio.com



화가와 혁명가. 즉 예술과 정치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이런 일상 또는 사건에, 음식을 만들고 일상과 사건을 기록하는 아름다운 손이 한 쌍 등장하니, 그 주인공이 바로 셰퍼드, 혹은 프리다 칼로가 호명하는 ‘인솔리토’다. 리베라와 칼로 그리고 트로츠키의 삶에, 처음에는 석회를 섞는 일꾼으로 다음에는 요리사로 그 다음에는 통역하고 기록하는 비서로 자리매김하게 될 십대의 (독서가) 셰퍼드가 멕시코시티를 실물로 느끼는 심정이 이렇다.


멜초르 시장에서 가까운 광장에는 코르테스 왕궁이 아직도 당당하게 서 있다.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정복한 다음 통치를 펼친 장소다. 광장의 동판에 따르면, 원래는 그가 머스킷 부대를 소집해 테노치티틀란을 차지할 계획을 세우던 요새였다고 한다. 그가 여왕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묘사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책에 나오는 장소에 서 있다는 사실, 그곳에서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다가 속이 뒤틀리면 바닥에 침을 퉤 뱉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79-80)


1940년 트로츠키 암살 사건 후 ‘재만 남은 주머니로 멕시코를 떠난’(326) 셰퍼드가 겪는 것은 40년대 미국이다. 전쟁 시 군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고 미술품들을 적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빌트모어로 운반하는 공익임무를 수행하며 이후 은둔 작가로 명성이 높아지던 중 광기와 같은 공산주의자 색출 바람에 휩싸이게 된다. 아름다운 서사작품으로 받아들여지던 그의 소설이 순식간에 ‘빨간’ 프로파간다로 둔갑되는 아이러니. 부조리. 덧없음. 프리다 칼로의 예언이었을까. “미안하지만 부조리와 덧없음을 빼면 내가 인생에 무슨 흔적을 남기겠어.”(215)

조지프 매카시. 출처 www.theredscare1950s.weebly.com

 

“범죄 기록이 뭐 필요하겠소? 이민귀화국은 증인들과 전문가들을 가지고 있소. 높은 보수를 받는 그 인재들은 증인이 필요할 경우 언제라도 만들어내지. 빨갱이가 아닌 사람도 빨갱이로 증명해내고 말걸. 만약 그가 공산주의자라면, ‘소란 죄와 히스테리’라는 죄목으로 걸어 불법 억류할 수도 있소.”
“어엿한 정당을 불법으로 만든다고요? 대체 어떤 나라에서 그런 짓이 가능한가요?” (520-521)


대체 어떤 나라에서? 어떤 나라인지 당신과 나 모두 알고 있다. ‘어엿한 정당’이 하루아침에 불법조직이 되고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수문학도서가 별안간 ‘불온서적’으로 둔갑하는 어떤 나라. 60여 년 전 셰퍼드가 겪은 일과 너무도 닮아 소름이 끼친다. 킹솔버가 그리는 멕시코와 미국. 예술-정치가 서로 어떻게 간섭하여 억압하거나 고양하는지를 읽어 낼 수도 있으리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고, 일하고, 글을 써온 셰퍼드가 반미활동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예술의 목적에 대해,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 하는 말.


예술 작품의 목적은 정신을 고양, 또는 외과 의사에게 지불할 병원비 마련에 있습니다. 또는, 사실상 그 두 가지 모두이기도 합니다. 예술은 한 사람을 기억시키기도 하고, 잊게도 합니다. (…) 그리고 책도 제가 언급한 것과 똑같은 효용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나 창문이 많지 않은 집에선 그럴 쓸모를 톡톡히 해냅니다. 예술 자체는 그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600-601)


셰퍼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던가. 리베라, 칼로, 트로츠키 만큼이나 이 세상에 ‘살았던’ 인물로 느껴지는 킹솔버의 페르소나 말이다. 소설가가 만든 ‘허구’의 이야기에 독자가 느끼는 ‘실제’ 감동은 핍진한 구체성에서 온다고 했던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는 그래서 옳고 옳다. 킹솔버의 ‘화가’ 그리고 ‘혁명가’와 똑같은 피와 살의 무게로 내게 자리하는 ‘요리사.’ 어떤 행운이 주어져 내가 멕시코시티에 가게 되는 날이 있다면 저 대통령 궁의 리베라 벽화 앞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셰퍼드를, 프리다의 인솔리토를 떠올리며 ‘바닥에 침을 퉤 뱉을’지도 모르겠다.

빼곡한 623쪽. 아무 데도 버릴 곳이 없이 탄탄하고 아름답다. 모든 원인과 결과와 과정과 단초가 한 권 안에 다 있다. 뭘 포함해서? 라쿠나. 킹솔버가 제목으로 선택한 빈틈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라쿠나lacuna’ 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사라진 부분, 이야기의 빈자리. 공백, 구멍.’  킹솔버의 라쿠나는 내게 다름 아닌,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동시에 희망에 찬 암시다. 문장으로 쓰이지 않은 채 모든 것은 말해졌다. 상상되어졌다.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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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ㅂ.ㄷ. 2015/01/31 00:13 # 삭제 답글

    그것이 사랑이었군요. 한 남자의 삶을 다른 어딘가에 닿게 하려던 물살, 안간힘이란.
    리뷰를 쓰면서 끝내 왜 그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던(않았던) 걸까 싶네요.
    브라운 부인이 내심 그 단어를 비워두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님 제가 둔한 건지도;;;)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들을 촘촘하게 엮어낸 리뷰가 참 좋습니다.
    조용히 잊힐 뻔했던 책을 이리 꼼꼼히 읽어내신 걸 보면 킹솔버 여사도 참 좋아하실 텐데!
  • 취한배 2015/01/31 11:52 #

    리베라와 칼로의 작품들을 좋아하듯이 셰퍼드를 실제인물마냥 좋아할 수 있게 하는 작가의 역량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말을 썼는데요, ㅂ.ㄷ. 님 표현처럼 '물살'도 참 좋아요. 작위적이지 않은 핍진성과 힘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요. 이 사람은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역설하지 않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브라운 부인의 담담한 손길까지도 제겐 완벽해 보였어요.
    초반에 멕시코 정치인들이 줄줄 나와 답답한 마음에 검색해 보았던 이름들 중 몇몇을 리뷰에 넣었는데- 별 무의미인 듯요;; (링크까지 걸려다가 웬 오버, 했답니다.) 보관함에 든 <본능의 계절>을 ㅂ.ㄷ. 님이 읽으시면 킹솔버 여사가 더 좋아하실 텐데!ㅎㅎ
  • 달을향한사다리 2015/02/02 16:58 # 답글

    아웅~ 이 글 정말정말 좋아요!! 더 할 말이 없어요, 진짜 좋아요^^
  • 취한배 2015/02/02 19:38 #

    읏. 사다리 님이 좋다 하시니 정말정말 기뻐요!! 좋게 읽어 주셔서 고맙슴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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