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NoSmoking


(맥주와) 포스팅. 널리 주목 받지 못했으나 내겐 비할 바 없이 좋았던 2014 상반기 책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출간일 순 나의 완소특5별들.



찍지 못한 순간에 관하여 - 10점
윌 스티어시 엮음, 최민정 옮김/현실문화


2013. 11  비사진적 순간들


한때 사진을 업으로 살았다. 그 직업에서 배운 것이라면 사진기를 내려놓는 일이 사진기를 드는 일만큼이나 사진가적 선택이며 직업정신이라는 것. 게으름을 차치하고는 주로 예의나 윤리의 문제에 관한 담론을 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들에게는 렌즈가 총 같은 폭력이 될 수 있음과, 프레임 밖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직업적으로 어떤 장면을 취한다는 얘기는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또한 듣지도 못하는 위험을 안고 있을 수 있다. 카메라를 든 바보 또는 깡패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 이후 여행 갈 때 내가 카메라를 갖고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사진이 없는 사진집. 고정된 이미지로 기록되지 않은, 지극히 사적이거나, 양심과 배려와 공감으로 인하여 결정(結晶)되지 못한 용기 있는 장면들이다. 글로 쓰는 마음속의 완벽한 한 컷 한 컷 들. 더 보고 싶고 더 읽고 싶어진다. 이미지와 글. 순간을 읽는 맛의 차이를 느껴볼 일이다. 그런 맛이라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도 있었다. 역시 아름다운.
 

나는 남자와 그의 고양이의 모습을 차마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에 어느 터프가이가 죽은 고양이를 안은 채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쉬이 잊힐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순간은 손만 대면 사그라질 듯했고, 남자는 너무도 슬퍼했다. 그리고 내가 왜 그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남자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사진을 찍을 때에는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28)



 

존재의 순간들 - 10점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명진 옮김/부글북스


2013. 12  부드러운 물결 같은 글


글을 줄줄줄 어쩜 이렇게 잘 쓸까. 죽음이 지배하는 십대의 회상록은 정말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슬픔이 가득하다. 어머니와 스텔라라는 기둥과 그 부재, 그에 대비되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묘사 모두 탁월한 문장으로 그려진다. 3부 ‘회고록 클럽 원고’는 ‘자전적 에세이’ 1, 2부와 성격이 조금 달라 1, 2부의 부들부들한 감상을 살짝 퇴색시키는 면이 없지 않으나 작가로 한창 활동하던 시기 생활인으로서의 솔직한 울프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묘미 또한 썩 나쁘지는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과 같은 역자인데, 전체적으로 편안한 번역이 좋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생각을 얻었다. 자기 본위의 이기주의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사람 본인을 이기주의만큼 잔인하게 해치는 것도 없고, 그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이기주의만큼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없다. (222)


 


술꾼 - 10점
한스 팔라다 지음, 염정용 옮김/로그아웃


2014. 2  채워지지 않는 갈증-몰락


보름 동안 쓴 작품이라니, 이 사람은 천재 아닌가. 띄엄띄엄 읽는다면 보름에 걸쳐 읽힐 만도 한 빼곡한 몰락의 기록. 웃음과 아픔을 이렇게 멋진 범벅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키득거리다가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중독에 빠져본 사람만이 묘사할 수 있는 취기의 작용, 끝내 채워지지 않는 갈증, 열등감, 분노, 복수심, 자멸. 너무 막막하고 슬퍼서 오히려 술이 번쩍 깨는 놀라운 작품이다. ‘술 책’ 리스트 top 10에 모신다.


“의사 선생님, 진료실로 가셔서 손수 알코올에 물을 섞어 저에게 화주 한 잔만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물컵 한 잔 가득이면 됩니다. 제가 이전처럼 즉각 쓰러져서 그것을 조금도 즐기지 못하는 그런 화주가 아니라, 저를 진정 다시 한 번 행복하게 만들어 줄 그런 화주 말입니다.” (360-361)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 10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필로소픽


2014. 3  베른하르트-우정


절판되었던 구판본을 원망스럽게 쳐다본 지 몇 년이던가. 깔끔한 새 옷과 새 문장으로 (너무나 조용히!) 다시 나타난 번역본이 반가워 탄성을 질렀다. 필로소픽 출판사에 영광 있으라. 더구나 <눈먼 부엉이>로 새롭게 보게 된 ‘번역가 배수아’ 님이니 독자로서 이만한 기쁨도 없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냉혹한 느낌이 드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애틋한 작품이다. 친구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쓰는 것, 저자도 친구도, 세간의 평이 어떠했든,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서전이나 자전의 뉘앙스가 농후한 작품들은 보통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건만, 베른하르트는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지 않고 친구를 칭송한다. 12년간을 지켜보면서, 특히 죽음에 아주 임박해 있는 친구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솔직함이 우정을 더욱 높여 가슴이 조금 아파지기까지 한다.


이 책에서는 파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우정 뿐 아니라 또 다른 한 사람, 자주 언급하지는 않지만 베른하르트가 ‘내 인생의 사람’이라 부르는 헤트비히 스타비아니체크에 대한 존경과 사랑도 그대로 전해져 마음이 아주 촉촉해진다. 증오와 냉소만으로 가득하리라 예상한 베른하르트의 마음 속 가득한 우정과 사랑, 맨얼굴과 심장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많은 수의 사람과 사랑이 아니라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온전한 내 편이라 여길 수 있는 우정과 지지가 아닐까, 했다.

 

헤르만 병동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 가운데서, 나는 비로소 내 친구 파울과의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보통 짧게 끝나고 말았던 다른 친구들과의 교제와는 달리 유일하게 긴 세월을 유지해 온, 내 삶에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로 가장 귀한 우정이며 그 어떤 일이 닥쳐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할 수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내게 가장 소중하며 가까운 존재가 된 한 인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는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럴 만한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죽음으로 인하여,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52-53)


 


불타고 찢기고 도둑맞은 - 10점
릭 게코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르네상스


2014. 4  상실의 박물관


희귀 초판본 거래업자 게코스키의 세 번째 책이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2007, 르네상스), <게코스키의 독서편력>(2011, 뮤진트리) 이후의 신간. 좋아하는 저자에다 출간 간격도 따라 읽기 아주 좋아서 대환영. 이번에는 책 뿐 아니라 몇몇 예술작품의 수난사를 다룬다. 저 유명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부터 뉴질랜드 우레웨라 벽화 절도 사건까지, 있다가 없는 것, 없다가 있는 것, 가짜로 있는 것, 있을지도 모르는 것 등에 대한 아쉬움과 기대, 분노와 갈망, 그리고 예술작품에 관한 윤리와 문화재 약탈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다. (‘상실의 박물관’은 서문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15개의 장이 각각 모두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서 퍽 호사스러운 독서였다. 특히 필립 라킨과 바이런에 대한 막연한 숙제의 느낌을 해소해주는 역할이 무척 고마웠다. 책과 책을 연결하여서 보관함을 불려주는 안내만큼이나(아니 사실은 더 많이), 보관함을 줄여주는 책과 논리가 나는 무척 좋다. 여성 혐오에다 인종차별 성향까지 있는 작가를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지 않겠는가.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작품과 작가를 완전히 분리해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사람. 나보코프의 아들이 최근 공개하기로 결정하여 번역서도 나온 <오리지널 오브 로라>에 대한 화끈한 문장은 특히 마음에 들었고, 나보코프를 한없이 사랑하여 그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아닌 바에야 미련 없이 보관함에서 삭제하였다.


이밖에도 위조범이 만들어낸 문서, 이스라엘에서 ‘소송’까지 겪게 되는 카프카의 자료들, 타이타닉과 함께 수장된 호화판 <루바이야트>, 이라크의 문화재 밀반출과 제국의 문화재 약탈 문제 등 모든 장들이 흥미진진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예술작품은 누구의 것이고 처분이나 보수 또는 파괴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 개인, 국가 또는 인류?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땅 속에 묻힌 헤르쿨라네움 서고나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운명, 즉 아쉽고 덧없고 ‘연약한’ 문화유산의 운명을 떠올려보면 지금 남아 있는 유산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박물관이나 골동품 시장에 문득 가고 싶어질지도.


게코스키의 직업적 특성상 느낄 법한 심정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제임스 조이스가 아홉 살 때 쓴 시 <너도냐, 힐리>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장(章)의 제목도 ‘부재와 갈망이 주는 기쁨.’ 부재하기를 바라는 한편 혹시나! 존재한다면 내 손으로 찾고 싶다는 희귀본 사냥꾼의 갈망, 너무 잘 알겠다. 이렇게 좋은 책을 써준 저자에게 행운이 있기를.


<너도냐, 힐리>의 실물이 단 한 부만 발견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나의 뇌리를 떠돌지 않을 것이다. (…) 상실된 파편이 뇌리에 떠돌고, 때때로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노래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추적의 기쁨을 위해 지불하는 가격치고는 적은 셈이다. 제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향한 추적일지라도 말이다. 그 기쁨은 그 그림자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하며, <너도냐, 힐리>의 지속적인 부재는 나를 활기차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것이 우울의 원천이 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러니 나는 그 물건이 절대로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냥 상실된 채 있는 쪽이 좋겠다. 하지만 언젠가 나타날 운명이라면, 당연히 그걸 찾아내는 사람은 바로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78-79)





새해 첫 책은 <오래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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