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Smoking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소박하고 따뜻하다. 300여 쪽의 작은 책에 무려 24편이 실려 있다. (왼쪽 주머니에도 24편) 단행본으로 뭉텅 읽는 것도 좋지만 한 편씩 연재되었던 차페크 당시 신문으로 한 꼭지씩 읽는 맛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주로 범죄물들로 형사, 경찰, 검사, 판사, 필적이나 연상 전문가 등이 등장한다. 상상하지 못할 반전이 기다리는 것도, 기상천외한 사건이 그려지는 것도 아니지만 묵직한 울림이 남는 몇몇 단편들에서 차페크의 신념과 색깔을 느낄 수 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동네 바보 클라라만이 발견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꽃 이야기, <푸른 국화>에서는 금지나 제약, 제재에 대한 조롱을 볼 수 있었고 저승에서 인간이 심판한다는 <최후의 심판>도 재미있게 읽혔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재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심판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가 종교인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뭔가 통쾌했다.


((스포? 스포!)) 제목 그대로인 <어느 배우의 실종>은, 성격은 괴팍하지만 연기는 뛰어났던 배우 벤다가 부유한 경쟁자로부터 제거당한 얘기인데 벤다의 신실한 친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됐지만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그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는데 눈물이 날 뻔했다.


“아닙니다. 당신을 공포에 떨게 하려는 겁니다. 당신은 절대 양심의 가책 따위로 괴로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너무 부자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끔찍한 사건의 전모를 (…)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당신은 눈을 감는 날까지 불안에 떨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들은 절대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교수대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존재만으로도 당신의 신경을 괴롭힐 수는 있습니다. (…)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이제부터 당신에게 마음의 평화란 없습니다. 내가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죽는 날까지 계속 이 일을 당신에게 상기시켜주겠습니다. 배우 벤다는 예술가였습니다. 내 말 듣고 있습니까?” (264-265, 어느 배우의 실종)


<도롱뇽과의 전쟁>(열린책들, 2010)으로 강렬하게 접한 작가이기에 솔직히 조금 더 파격적인 뭔가를 기대한 게 사실이지만 이 짤막짤막하고 담담한 이야기들로도 한층 더 가까이 차페크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복잡한 장치나 거창한 플롯 없이도, 장르나 형식에 상관없이 모든 글에 드러나는 게 작가의 목소리니까. 그리고 차페크의 목소리는 결국 전체주의 비판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다. ‘공상과학’ 소설이든, 추리물이든, 희곡이든.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모비딕 근간 희곡 <R.U.R.: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을 기다리는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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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락방 2014/12/24 09:00 # 삭제 답글

    아, 이 책이 이런 내용의 책이었군요. 저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책인데 덕분에 또 유심히 보게 되네요.

    문득 신뢰할만한 혹은 취향이 비슷한 리뷰어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측근님. 그에 앞서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도요. 만약 제가 측근님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면 측근님의 블로그를 찾아 오지 않았을 것이고,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책에 대한 글을 볼 수 없었을 것이며, 이 글을 볼 수 없었다면 이 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인 상태로 있었을 수도 있겠죠.

    운명적 상대 라는 말에는 좀 회의적이긴 하지만, 운명의 흐름선상에 지금 내 옆의 사람들이 놓여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요.

    아, 리뷰 한 편, 포스팅 하나에 제가 너무 거창하게 나갔나요?
    측근님 글을 읽는게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헤헷 :)
  • 취한배 2014/12/25 02:54 #

    저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호감이 없이는 그 어떤 글도 꼼꼼히 읽지 않게 되더라고요. 정보가 워낙에 많고 더구나 책이며 리뷰며 넘쳐나는 게 글이니까요. 그 홍수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읽는 게 가장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는 거, 어쩌면 그게 제일 좋은 필터일 수 있다는 거. 우리는 서로 (제가 싫어하는 밀당 없이ㅋㅋ) 호감 있는 사이. 제 글을 꼼꼼히 읽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다락방 님에게 애인이 생겨도 책 얘기로 엮인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순 없을 거예요. 질투할 수는 있어도.ㅎㅎ 다락방 님이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서 읽은 그림책, '나를 선택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인기어린이 대사를 들은 주인공 기분이라는 거 알아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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