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인문서가에꽂힌작가들 NoSmoking

 
펴낸이나, 옮긴이, 편집인, 디자이너 모두 웬만한 애정이 없이는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책들이 분명히 있다. 행운처럼 올해도 이런 책들 덕분에 행복한 독서를 해왔다. 고마운 마음과 기꺼운 인사를 이렇게 적어본다.


표절과 오마주

뉴턴이 말한 ‘거인들의 어깨’(1)가 겸손의 표현이었든, 경쟁자에 대한 가차 없는 일갈이었든, 내게는 과학 분야 지식축적에 관한 말로만 보이지 않는다. 예술에 있어서도 현재의 모든 창작은 이미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행해지고 있음이다. 멀리 보게도 하지만, 멀리 보아야만 하는 족쇄, 경외의 대상. 특히 표절이 문제가 될 때는 두렵기까지 할 거인들.

페렉은 이 표절이라는 문제를 짧고 굵게(『겨울 여행』), 때로는 장황하게(『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그리고 매번 통쾌하게 다룬다. 농담과 가짜, 아주 간단한 장치로, 장난스럽게, 그러나 창작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의식을 묵직하게 남기면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서, 존재하지 않는 그림들의 세밀한 묘사가 혀를 내두르게 했다면 『겨울 여행』에서는 19세기 프랑스 문학 거인들이 표절작가로 농락당한다. ‘짜릿한 전율.’(2)


그걸 읽기 시작하자마자 뱅상 드그라엘은 무어라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는데, (…) 마치 눈앞에 있던 문장들이 갑자기 그에게 친숙한 듯했고,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했으며,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거의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도 한, 어떤 문장에 대한 또렷하면서도 흐릿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 여행 / 어제 여행』, 13쪽)


                                                                                                                                            


조르주 페렉 선집 4권에는 hiver-hier, 겨울-어제, 페렉-루보, 표절-오마주의 관계항이 있다. 표절의 무자비함에 비해 누군가를 기리는 오마주는 얼마나 따뜻한가. 페렉에 대한 루보의 우정. 페렉이 툭 던져놓은 문장에 응답하듯, 먼저 떠난 친구 작가가 심어놓은 나무를 세심히 돌보는 손길 같은 루보의 『어제 여행』이 그렇다. 잎을 다 버린 간결미의 ‘겨울’ 나무에 새순이 돋고, 덧붙여진 ‘어제’들로 무성한 가지를 가진 연작이 된다.

나무가 없이는 손길이 의미가 없듯, 안목이 최적의 대상을 만났을 때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읽히지 않으면 죽은 나무, 그런 의미에서 타부키가 되살려낸 페소아가 있다.


타부키가 페소아를 추모하는 방식

추모하기란 다른 말로 살려내기다. 『레퀴엠』에서 타부키가 이뤄내고 있는 것. 흠모하고 존경하던 작가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고 투정도 부리다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듣고, 이별하기. 그것이 환각이나 꿈이나 무의식 무엇이든, 분명 아름답고 따뜻한 문학적 장송곡임에는 틀림없다. 타부키가 페소아를 부활시켜 나누었던 대화는 ‘문학의 역할’이라는 주제 하에 진행되는 짧은 강연 같은 느낌까지도 준다.


나와 함께한 것이 편하지 않았나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내가 대답했다, 대단히 중요했어요, 하지만 불안하게 했지요, 말하자면 언제나 날 가만두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랬겠지요, 그가 말했다, 나와 관계된 건 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말예요, 문학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안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의식을 평온하게 하는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레퀴엠』, 112쪽)
                
                                                                                              


포르투갈 DNA를 가진 듯 느낀다는 타부키는 평생 페소아와 함께 했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마주친 작은 시집 『담배 가게』와의 인연이 영원으로 이어진 격이다. 타부키 타계 후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 발췌본 『불안의 책』(까치글방, 2012)과 곧 이은 완역본 『불안의 서』(봄날의 책, 2014)까지도 그런 느낌이다. 페렉-루보와는 달리 페소아-타부키는 살았던 날이 겹치지도 않지만 문학적 우정 또는 흠모가 서로에게 배어있는 이름들이 되었다.

꿈의 언어를 누구보다 문학에서 잘 실현한 타부키. 특히 『꿈의 꿈』에서 예술가들로 하여금 꾸게 한 20개의 짧은 꿈들은 어떤 의미에서 20개의 전기(傳記)를 밀도 있게 함축한다고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타부키 식 전기들이자 타부키가 선택한 예술가들에 대한 오마주. 그들의 꿈속을 함께 헤매보는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들이다.

                                                                                                                        


레퀴엠과 꿈. 영원한 잠. 죽음. 체사레 파베세가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에 이어 오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사랑과 죽음

파베세라고 하면 늘 엔디미온(3)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필멸의 생 대신 영원한 잠으로 불멸하게 된 아름다운 청년. 잠든 엔디미온의 곁에는 셀레네, 헤라, 아르테미스 같은 여신들의 이름이 함께 한다. 즉, 사랑이다. 맺지 못하고 바라(만)보는 사랑. 사랑하고 좌절하고 ‘자살이라는 생각만으로 버티’고(4) 시를 쓰고 ‘거인’이 되어갈 무렵, 돌연 토리노의 호텔 <로마>에서 수면제 열여섯 알을 삼킨 파베세. ‘꿈,’ ‘잠자는 친구,’ ‘당신이 잠든 밤’ 같은 제목의 시는 그래서 예사로이 읽히지 않는다.


깊숙한 핏속에서 그런 신선한 어루만짐이
공기 속 너의 육체를 짓누를 것이며,
새벽녘 그 따스한 순간들은 다른 떨림에,
허무의 떨림에 반응했다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아득한 어느 날
한 육체가 너의 곁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았듯이, 알게 될 것이다.
(‘꿈’ 부분, 『냉담의 시』 20쪽)



 








이루지 못한 사랑, 듣지 못한 목소리, 받지 못한 미소들, ‘고양이들은 알리라’고 노래하는 시인. dis-amore 즉,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5)가 고스란한『냉담의 시』다. 평범한 단어들이 곱씹을수록 깊이와 아픔과 우울을 준다. 결국 ‘노력했지만 알지 못했던 누군가’(6)를 떠올리며 시집을 덮게 되리라. 표지의 시인 얼굴을 다시 보며 잃어버린 사랑과 영면(永眠)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파베세의 어깨에 고마워하게 되리라.


2014년 12월, 따끈따끈한 파베세를 받아들고 설레고 좋아, 여기까지 왔다. 자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저 문장이 곧장 들어왔다.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니까.’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다, 눈치 보지 않고 내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책들이 꾸준하기를 바라본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고맙고, 내가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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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약 내가 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이는 모두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입니다.” 뉴턴 당시 자신의 경쟁자 후크에게 보낸 글로써, 후크는 등이 굽었고 키가 작았다.
(2)‘오직 사실을 가장하는 행위의 즐거움과 짜릿한 전율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 허구 이야기의 세부 묘사가 대부분 가짜인 것처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100쪽)
(3)『레우코와의 대화』(체사레 파베세, 열린책들, 2010) 중 ‘야생 여인’ 편은 엔디미온과 헤르메스가 나누는 대화다.
(4)『거대한 고독』(프레데릭 파작, 현대문학, 2006) 68쪽. ‘열여섯 알의 수면제’는 303쪽.
(5)기형도, ‘빈집’ 중.
(6)『냉담의 시』118쪽, ‘마지막 블루스, 언젠가 읽게 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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