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나무인형 NoSmoking

교수대의 비망록 - 10점
율리우스 푸치크 지음, 김태경 옮김/여름언덕


사형을 얼마 앞에 두고 써 내려간 율리우스 푸치크의 글이다. 20세기 초중반 체코에 살았던 지식인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나치의 탄압과 지하활동 검거, 동료의 배신, 고문, 결국 사형선고, 돌이켜지지 않는 집행. 혁명도, 자유도, 그토록 사랑했던 ‘공기, 태양, 바람’(185)도 더 이상 자기 것일 수 없는 순간이 설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푸치크는 무엇을 쓰게 될까. 인간성이다. ‘나무인형’과 대조되는 따뜻한 인간성. 혹독하고 부조리한 환경에서 더욱 드러나게 마련인 그것. 푸치크 부인의 서문에서부터 무언가 울컥-하게 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은 지 2주 만인 1943년 9월 8일 베를린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프라하의 판크라츠 감옥에 있는 동안 글을 썼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감방에 종이와 연필을 넣어주고, 다 쓴 원고를 한 장 한 장 남몰래 밖으로 가지고 나온 사람은 간수였던 A. 콜린스키였습니다. (14-15, 푸치크 부인의 서문)


콜린스키. ‘평범한 얼굴을 한 악’과는 다른, 자기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고심 없이 기계장치처럼 자기 할 일을 하거나 사유 없는 복종을 하지 않은 사람. 푸치크의 글들이 남아 있게 한 장본인. 대단한 영웅처럼 그려지지 않으나, 푸치크에게 ‘첫사랑 때와도 같이 설레게 했던’(184) 연필과 종이를 몰래 건네는 배려를 할 줄 알았던 이이를 잊을 수 없다.


“혹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쓰고 싶은 것은? 물론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누가 당신을 배신했는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당신과 함께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147)


정치범으로 수용된 만큼 이념이나 조직에 대한 신념과 걱정, 그리고 고문의 참상이 가슴 시리게 느껴지는 한편,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푸치크가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다. 자기가 처해 있는 환경, 즉 감방에서 보고 겪는 군상들. 그렇다, 결국은 사람들, 나를 둘러싼 그들을 얘기하는 것보다 더 내가 처한 상황과 세계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으리라. 그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우정, 배려, 배반, 폭력성, 열등감, 그리고 그 모든 이데올로기와 정치와 분쟁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간성까지.  


1년 동안 같은 감방에 있는 두 사람! 이 사이에 ‘아버지’라는 호칭에 이미 ‘ ’가 없어졌다. 나이가 다른 두 죄수는 정말로 아버지와 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상대의 버릇이나 마음에 들게 말하는 방식, 끝내는 말투까지 몸에 익혔다. 그런 버릇이나 말하는 방식, 말투를 가지고 감방에 들어온 사람이 나였는지 아버지였는지 이제는 알 수 없을 정도이다! (50)


같은 감방 동료, 나이가 지긋해 ‘아버지’라 불렸던 이에 대한 설명이다. 푸치크가 고문을 당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돌아올 때마다 습포를 덮어주고 수프를 입에 넣어주고 보살펴주었던 사람. 그리고 푸치크가 ‘동포들’이라고 부르게 되는 체코인 경관 간수 몇몇에 대한 언급에서 마음이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모른다. ‘정상적인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장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범’(157)이란 그런 것이다. 물론 이런 모범들만 있는 건 아니다. 배반한 동지 미레크에 관한 부분.


페체크 궁에서 보낸 최초의 나날은 내게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받았던 타격 중 이때의 것이 내게는 가장 참기 힘들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지 배반은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그에 대해 관대하게 판단하고 정상을 참작한다고 해도, 미레크가 아직 불지 않은 일체의 것을 고려해 봐도 나는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배반이었다. (…) 비겁한 자는 자신의 생명 이상의 것을 잃는다. 그는 영광에 넘친 군대에서 탈주한 끝에 적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적에게조차 경멸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살아 있다 해도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 (71-73)


의연한 죽음 앞에서도 배반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까지도 고귀한 인간성이기에.『생존자』(테렌스 데 프레,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 2010)에서 본 일화, ‘이 모든 걸 글로 써 달라’고 했던 어느 희생자의 말에 대한 메아리 같은, 진정한 기록의 힘. 그리고 죄수에게 은밀하게 종이와 연필을 건네주는 간수의 작은 배려, 인간성이 우리에게 남겨준 책 『교수대의 비망록』이다. 당신 덕분에 삶이 고마워지고, 올바르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귀한 기록. 끝에 실린 옥중서간까지도 소중하고 고맙다. 부모와 누이들, 부인 구스티나에게 쓴 편지들. 사형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죽음은 항상 살아 있는 사람들,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만 슬픈 것’(192)이기 때문에 그들을 오히려 격려하고 걱정하는 이 사람, 율리우스 푸치크. 사형 일주일 전 두 누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이토록 단순하고 담백한 끝인사다.


그럼 모두에게 열렬한 키스와 포옹을 보낸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묘한 여운이 남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또.
-너희들의 율로 (197)







덧글

  • 다락방 2014/11/27 22:16 # 삭제 답글

    아 측근님.. 좋네요, 참 좋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잘 수 있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어요.
  • 취한배 2014/11/28 01:35 #

    ㅜㅜ고맙습니다. 좋은 책이었어요. 다락방 님 굿나잇+좋은꿈-
  • 진냥 2014/11/28 10:32 # 답글

    아, 이 책... 아주 오래 전에 읽었는데 참 인상 깊었습니다. 파시즘이라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죽음에 직면에서도 어떻게 하면 이렇게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가슴 에는 일입니다.
  • 취한배 2014/11/30 02:28 #

    '의연함'이라는 말이 정말 적절한 책이었지요? 장황한 유언이 아니라 다만 인간성을 가졌던 이런이런 이름들을 기억해달라는 당부가 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책의 소용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이런 책들 덕분에 잘- 살고 싶어져요. 오래 전에 읽으셨다니, 반갑습니다, 진냥 님.
  • F 2014/11/29 23:06 # 삭제 답글

    이 책 읽기 시작했는데 가슴이 먹먹하네요 ㅠㅠ 밑줄 그은 부분 나타날 때마다 반가운 심정이 종종 먹먹한 가슴을 달래주긴 하지만 역시나 읽기 힘드네요. 흑흑
  • 취한배 2014/11/30 02:31 #

    아! 에프 님.ㅜㅜ 에프 님에게 감동받았어요. 이렇게 금방 같은 책을... 전자책, 정말 좋군요. 리뷰에는 차마 못 썼는데 부인과의 애틋한 사연도 무척 가슴 저렸어요. 흑흑 에프 님 고맙습니다, 같이 읽어주셔서.
  • 취한배 2014/12/04 00:01 #

    (요즘 소식도 없는)에프 님, <에프>라는 책 나온 거 알아요?ㅎㅎ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90692
  • 달을향한사다리 2014/12/03 15:32 # 답글

    정말 좋은 책이리라 확신하게 하는 취한배님의 글이네요. 근데 전 아플 거 같아서 당분간은 못 읽을 것 같아요...
  • 취한배 2014/12/04 00:01 #

    감동 받은 게 너무 티 나나요? 흑- 저는 정말 필요할 때 만난 것 같아요. 그럼요, 책이 슬금슬금 다가올 때 읽어야지요. 당분간은 아닌 걸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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