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대한 백과사전 Smoking

눈에 대한 백과사전 - 6점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눈(雪)에 관한 모든 것을 담는 ‘소설책’ 한 권이라면, 그것도 백과사전의 형식, 거기에다 사랑이야기까지 갖는 것으로. 멋지고 영리한 기획이다. 눈과 관련된 어휘들의 사전적 정의를 비롯하여 기존 작가들의 사연이나 작품 조각, 전설, 학술연구서, 편지글, 희곡, 온갖 자료들과 ‘내’ 이야기, ‘내’가 만든 이야기 등등을 사전식으로 배치하여 미주, 각주, 링크가 각 장들을 서로 연결하고 침투하고 넘나들게 한다. 소위 포스트모던. 형식은 그렇다 치고 띄엄띄엄 서사를 이루는 사랑은 실망스럽게도 매우 모던하여, 구태의연에 오그라드는 손발이 좀 머쓱하다.


친애하는 B.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당신은 거듭 물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특별한 화법으로, 같은 질문을 상기시키더군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당신 때문에 내 가슴이 이토록 아프다는 걸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란 아주 쉽습니다.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죠. 하지만 고문처럼 깊은 고통을 주는 이는 사랑하는 사람뿐입니다. (118)


그러니까, 괜히 겉멋만 잔뜩 부린 소설이라는 느낌을 나는 받았는데 글쎄,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살짝 게으른 편집으로 인해,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까지! 열심히 읽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 게으른 편집이라 함은, 몇몇 장 끝에 ‘ㅇㅇ(한글표제어)를 보라’는 링크가 달려 있는데, 어떤 것은 찾아보기가 까다롭다. 왜냐하면 각 장은 영어표제어에 따라 알파벳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직역되지 않은 한글표제어 장이 꽤 있기 때문. 그리하여 나같이 게으른 독자는 링크를 무시하기가 일쑤다. 게으른 편집이 게으른 독서를 방치한 사례.

미주는 본문의 열쇠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백과사전’에 녹아들어 재미를 더한다고 보았는데, 각주는 뭐랄까... 젠체한다.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려고 무척 애 쓴 흔적처럼. 어떤 장에서는 ‘참고문헌’까지 등장하는데, 아는 작품이 많을수록 오호- 할 기회와 본문에 끄덕끄덕하는 순간이 더 많으리라는 건 틀림없겠으나 표제어, 미주, 각주, 링크, 참고문헌 등등, 장치가 너무 많아 보인다. 어쩌면 이 책은 정말 백과사전처럼, 손닿는 곳에 두고 가끔씩 궁금한 표제어를 찾아 읽고 미주와 각주 링크 참고문헌까지 충실히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우우크카르니트’라는 표제어가 궁금할지? 밑줄-


우우크카르니트는 ‘빙하 끄트머리에서 분리된 빙괴’를 뜻하는 서 그린란드 말이다. (…) 서 그린란드 에스키모어에는 얼음과 눈을 묘사하는 단어가 49가지 있는데, 아래는 그 가운데 일부다.
(…)
3. 피디라크(Piddilaq) : 눈 위에 싼 오줌.
4. 술라르니크(Sullarniq) : 문가로 까불리며 날아온 눈
(…)
7. 레아리스베르 이트사트(Reariswer Itsat) : 눈 속에서 흘레붙는 늑대들
-줄리언 펙 목사의 노트에서, 그린란드 (267-268)


술라르니크를 밟고 나가 피디라크를 누던 와중 레아리스베르 이트사트를 보았네, 라고 괜히 써보니, 그린란드의 어느 아침이 그려지면서 문득 북국의 차고 맑은 공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영국 정통파 신예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실험적인 연애소설’(뒤표지)이라는데, 실험은 복잡하고 연애는 구태의연하다, 고 쓰면서 걱정이 영 없는 건 아니다. 혹시 내가 잘 못 읽은 건 아닐까하는. 왜냐하면 이 책, 무려 이런 헌사를 갖고 있으므로;






덧글

  • 다락방 2014/11/06 09:22 # 삭제 답글

    누군가를, 그것도 대단한 누군가를 위하여 글을 쓴다고 해서, 그 글이 꼭 대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측근님. 마음은 가득이되 능력이 되지 않을 수 있잖아요. 전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능력보다 마음이 더 큰 책이로구나, 생각됩니다.
  • 취한배 2014/11/06 11:09 #

    오 역시 힘이 되는 다락방 님. 저를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작품과의 연관보다는 아마 작가가 이 작품을 마무리 할 당시 제발트가 사고로 사망(2001년 12월)하였기에, 그를 추모하고자 한 것 같아요. 하신 말씀은 100% 동감. 제가 아무리 베케트를 좋아한다고 이 블로그에 '베케트를 위하여'라고 써 놓는다고 베케트 식의 감동이 있을 리 만무한 것 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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